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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태원 Taewon Suh Nov 03. 2017

누가 휘트니 휴스턴과 머라이어 캐리를 성공시켰나?

20세기 음악산업계의 세 거물

산업은 언제나 독점을 꿈꿉니다. 물론 법의 테두리 안에서지요. Size와 scope이 주는 이점을 통해 최대한의 수익을 창출해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전통 경제학적 논리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수정되고 있지만, 20세기 말까지는 음악산업을 포함한 모든 산업계에 걸쳐 진리에 가까운 원리였습니다.
90년대와 21세기 초기에 걸쳐 이루어졌던 음악산업에서의 M&A 사례를 살펴보면, 자본의 독점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수익성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잘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음반의 기획과 판매가 음악의 퍼블리싱보다 더 중요해진 20세기 중반부터 음원 포맷의 급변으로 인한 산업의 재편이 이루어진 21세기 초까지는 음반기획사의 전성기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20세기 말 대형 음반 기획 유통사의 전성시대에 음악산업을 좌지우지했던 세 명의 거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Clive Davis, Tommy Mottola 그리고 LA Reid입니다.


대중음악에 대해 전문가적 지식을 가진 분이 아니라면 이들의 이름은 낯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잘 알려진 두 디바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 두 디바는 바로 대중음악의 역사로 봐도 최고 디바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한 Whitney Houston과 Mariah Carey입니다.  


휘트니 휴스턴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음반 기획자 Clive Davis의 작품입니다. 그잠재력 만빵의 약관의 휘트니 휴스턴을 1983년 당시 가장 매력적인 계약 조건으로 확보하지요. 이 최고 유망주를 위해 그는 수많은 곡들을 세심하게 수집한 후 1985년 전곡이 싱글이 될만한, 야심찬 데뷔 앨범을 발매하게 됩니다. 올드스쿨인 자신의 상업적 취향대로 traditional pop R&B전형과 같은 앨범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차트를 석권했던 이 데뷔 앨범과 동질의 두 번째 앨범을 통해 휘트니 휴스턴은 놀랍게도 7개의 연속 1위 싱글을 만들어냅니다. "과연 클라이브 데이비스야"하는 탄성이 나왔던 성공 사례입니다.


휘트니 휴스턴의 7번째 연속 1위를 축하하는 클라이브 데이비스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6-70년대는 Columbia/CBS를 통해 8-90년대는 BMG 휘하의 자신의 Arista 레이블을 통해 음악산업의 최정상에 머물렀던 거물 중의 거물입니다. 특히, 8, 90년대 Grammy Award 시상식 후에 항상 이어졌던, 그가 주최하는 after-event party의 규모와 면모는 그의 특출 났던 영향력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그가 결정하는 파티 메인 퍼포먼스와 그 주인공은 쟁쟁한 아티스트와 산업 관계자 앞에서 업계의 정상에 올라갈 가치가 있는 아티스트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전략적 세리머니였습니다. 미국의 음악산업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LA Reid와 Babyface와 함께 LaFace Records를 설립하고, 본인은 랩뮤직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Sean Combs와는 Bad Boy Records를 설립합니다. (그는 사실상 뒤에 설명할 Tommy Mottola와 LA Reid의 실질적인 멘토이기도 합니다.) NYU, Tisch School of the Arts에 소속되어 있는 The Clive Davis Institute of Recorded Music은 그의 명성에 대한 또 다른 상징이 되겠네요.


20세기의 마지막 메가 히트 앨범인 Carlos Santana의 [Supernatural]은 그의 기획력을 다시 한번 (그러나 마지막으로) 드러낸 대박사건이었습니다. 아무도 퇴물 산타나가 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천만 유닛 판매고의 다이아몬드 앨범을 갖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동시대 팝 아이콘과의 협업으로 이것을 이루어냅니다. 이후 데이비스는 이 성공을 80년대형 산타나인 프린스를 통해 재생산하려고 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성공의 공식이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회한 산타나와는 달리 콧대 높고 아직 팔팔했던 프린스는 당연히 기획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지요.


관리적 기획이 창조적 탤런트와 만날 때는 항상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두 다른 생각이 하나로 움직일 수 있냐]하는 것입니다. Arista에서 데이비스는 90년대 초 hey days를 지나쳐버린 Hall and Oates를 당시 한창 뜨거웠던 Michael Bolton처럼 만들려는 (듣기에 그럴싸한) 계획에 실패하고 아예 그들을 슬럼프로 밀어 넣은 바 있습니다. 그들의 1990년작 [Change of Season]은 데이비스와의 갈등이 고조되기 전 발매되었던 (그러나 실패했던) 슬픈 명반입니다. 이른바 unplugged music 유행의 초기에 forky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앨범이었습니다. 밴드와 제작자 사이의 손발이 안 맞는 관계로 2%가 모자란 앨범이었지요. 데이비스를 통한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은 끝내 발매되지 못하고 사장되어 버리고 Hall and Oates는 90년대를 거의 잊힌 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은 누가 옳았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팀 내에 다른 의견은 좋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일화입니다. Daryl Hall은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Arista를 벗어나 1993년 타미 모톨라의 소니 뮤직 산하의 Epic 레이블을 통해 [Soul Alone]이란 솔로 앨범을 내놓습니다. 정말 이상하게도, Michael Bolton + Mariah Carey + Paula Abdul를 섞은듯한 앨범이었지요. 아마도 데이비스가 원했던 음반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상업적 포텐셜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하며 듀오의 슬럼프에 도장을 찍어버립니다. Daryl Hall과 같은 예술가 타입이 누구를 따라 하라는 참견에 고분고분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맞는 얘기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80년대에 음악을 듣던 세대는 비닐 LP 혹은 카세트테이프의 뒷면에 아로새겨 있던 이른바 Big 6(CBS, EMI, BMG, Polygram, WEA, and MCA)를 기억하실 듯합니다. 1991년 Sony Music의 CBS 매입은 본격적인 CD 시대를 앞두고 최고의 수익률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1998년 Polygram과 MCA를 합친 Universal Music Group의 탄생은 이름 그대로 이에 대한 확증이었습니다. 여러 과정을 거쳐 최근에는 Big 3가 되었습니다. Sony Music, Universal Music Group, and Warner Music Group가 현존하는 세 마리의 공룡입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는 Whitney Houston과 1988년 데뷔한 Mariah Carey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던 기간입니다. 송라이팅의 능력 없이 기획에 의존하던 휘트니 휴스턴은 기대보다 일찍 전성기를 마감하게 됩니다. 반면, 자신의 곡 작업에 항상 참여하는 머라이어 캐리는 새 밀레니엄 초기 몇 년의 슬럼프 시기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세 decades 동안 top act 자리를 지킵니다. 머라이어 캐리를 픽업한 사람은 바로 Tommy Mottola입니다. 그에 대한 일화는 이미 소개된 바 있지요.


타미 모톨라는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멘토십 하에서 늦게 음반업계에 진입했지만 야성적인 행동력과 기민한 판단력 그리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또라이 기질, 마지막으로 두 번째 부인과 관련된 행운으로 인해 짧은 시간에 업계의 정상에 우뚝 서게 됩니다. 그의 야성적인 라이프 스타일은 1976년 디스코/댄스 히트였던 Dr. Buzzard's Original Savannah Band의 [Cherchez la femme]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언급된 이 노래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는군요.


Tommy Mottola lives on the road
He lost his lady, two months ago
maybe he'll find her, maybe he won't
Oh no, never, no, no
He sleeps in the back of his grey Cadillac
Oh my honey
Blowin' his mind on cheap grass and wine
oh ain't it crazy baby, yeah
Guess you could say, hey hey, this man has learned his lesson, oh-oh, hey, hey
now he's alone he's got no women and no home
for misery oh- ho, Cherchez la femme


The Wedding of Mariah Carey and Tommy Mottola


이 글에서 언급하는 거물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미국 사회는 학연과 지연은 중요성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인맥의 중요성은 오히려 어떤 사회보다 더 극심합니다. LA Reid는 Boyz II Men의 [End Of The Road]와 같은 곡의 송라이터와 프로듀서로 시작해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도움으로 Babyface와 함께 LaFace Records란 음반기획사를 운영하게 됩니다. Usher와 TLC와 같은 top act를 키워냅니다. 클라이브 데이비스나 토미 모톨라와 유사하게 P!nk 같은 21세기형 디바를 발굴하기도 하지요.


Sony Music 산하의 Epic을 거처 Arista의 최고경영자직을 수행하던 그는 2004년 소니가 BMG와 병합하자 자리를 그만두고 또 다른 병합체인 The Island Def Jam Music Group의 수장이 됩니다. 이 시점에서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모멘텀이 되는 에피소드가 발생하지요.


토미 모톨라와 이혼하고 Columbia Records와도 결별한 머라이어 캐리는 Virgin Records America를 통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1억 달러라는 엄청난 계약금액에도 불구하고 발매한 첫 앨범 [Glitter]는 정말이지 재난이었습니다. 이혼 이후 어떤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지 싶을 정도로 현실과 유리된 태도로 만들어진 앨범이 아닌가 합니다. 버진은 앨범 발매를 전후하여 거의 정신 파탄 상태에 이른 머라이어 캐리에 대한 기대감을 재빠르게 접어버리고 계약금의 반을 페이 아웃하며 계약을 파기합니다. 1억 달러를 날리는 것보다는 5천만 달러를 날리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으며, 사실 업계 전반에게는 비공식적인 사망 선고였습니다. 머라이어 캐리는 다음 해 Island Records와 계약하고 [Charmbracelet]을 발매하지만 그 실적은 전작과 과히 다르지 않은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이 기간에 전남편 토미 모톨라의 악의에 찬 공작이 있었다는 점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두 번에 걸친 헛손질에 대중이 머라이어 캐리도 이제 끝인가 보다 하고 생각할 즈음 그녀는 놀라운 반전의 컴백을 해냅니다. 바로 LA Reid가 기획자이자 총프로듀서로 참여한 [The Emancipation of Mimi] 앨범으로 90년대의 명성을 완전히 회복하지요. 이 앨범으로 인해 LA Reid는 업계의 최고 능력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숨이 멈쳐가는 머라이어 캐리에게 산소 호흡기를 끼우고 벌떡 일어나 뛰게 만든 셈이지요. 이후 LA Reid는 계속해서 Kanye West, Rihanna, Justin Bieber와 같은 대박을 연속해서 터뜨리게 됩니다.


LA saved Mariah!


이 셋은 각각이 특징적으로 삶의 다른 경로를 거쳤다고 하겠습니다.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NYU 학부와 Harvard MBA를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입니다. 토미 모톨라는 업계의 밑바닥부터 성장한 자수성가형이지요. 반면에, 엘에이 레이드는 뮤지션으로 시작해 프로듀서로 명성을 얻고 경영자로 성장한 케이스입니다. 소속 아티스트의 곡에서 소개되는 이들의 스타일도 사뭇 제각각입니다.


1979년 Aerosmith의 [No Surprize]에서 Steven Tyler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Old Clive Davis said he's surely gonna make you a star, just the way you are." 1975년 Hall & Oates는 [Gino (The Manager)]에서 토미 모톨라를 이렇게 묘사하지요: "You couldn't live without little Gino, no. That's what he tells me, little Gino, no." 한편, P!nk는 2001년 [Don't Let Me Get Me]에서 이렇게 불평합니다: "LA told me, [You'll be a pop star. All you have to change is everything you are.] Tired of being compared to damn Britney Spears. She's so pretty, that just ain't me."


이 글에서 짧게 소개한 세 명의 경영자는 20세기의 후반과 21세기의 초기를 호령한 음악산업계의 거물입니다. 각자가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의 산물이지요. 반대로 이들 각각의 분석해 보면 그 시대 음악산업의 흐름을 알게 됩니다. 앞으로 미래에 음악산업은 어떠한 리더를 갖게 될까요? 이들 셋과는 어떤 특성에서 유사한 부분도 있겠지만 다른 형태의 리더십을 가져야 할 것이란 점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경영에서 가장 흔히 발생하는 오류는 과거의 성공을 되풀이하려는 confirmation bias일 것입니다.




*Title Image: 2009년 VEVO 론칭 파티에서 나란히 선 세 거물, 왼쪽으로부터 LA Reid, Clive Davis & Tommy Mottola


[When You Believe] by Whitney Houston and Mariah Carey, in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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