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에필로그 5

by 은예진

잘하는 만큼 성깔 또한 대단한 아내는 조원구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형제들을 모두 내쫓아 버리고 집안일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를 두고 목을 매려고 생각했을 만큼 독한 여자이니 성깔이 있는 것이 당연하였다.


조원구는 그녀의 성깔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아니 도리어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그녀가 대단하다 싶었다. 이제 그는 자기 재산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운용되는지 전혀 모르지만 그래도 아들 얼굴만 보고 있으면 그저 흐뭇해 웃음이 나온다.


조원구가 윤이와 아들 윤재를 데리고 어화둥둥 하는 사이 중국식 옷을 입고 안경을 쓴 남자와 단발머리에 수수한 여학생 복장을 한 여자가 문을 두드렸다. 남녀는 조원구 나리에게 검은 나비가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검은 나비라는 행랑아범의 말에 조원구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거기 여전히 새침해 보이지만 성숙한 눈빛을 가진 여인과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키듯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이이게 누구야? 정말 검은 나비인가? 자네가 나를 찾아오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조원구의 호들갑스러운 인사에 요즘 고리채를 놓고 이자를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없는 그의 아내가 주판을 손에 든 채 나왔다.


검은 나비와 미령이 서로를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검은 나비가 먼저 미령을 알아보았고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보고 나서야 미령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평양 부자 조원구의 집에 온 귀한 손님 접대 상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화려했다.


임금님 배를 닮은 그릇에 올려놓았다고 해서 어복쟁반이라 불리는 요리에는 귀한 송이버섯과 소고기가 듬뿍 올라 있었다. 평양식 막국수와 만두까지 조원구는 본이와 유성준 부부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기 위해 안달을 했다. 자기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여기 모인 두 여자분 덕분이라며 검은 나비 이본과 아내인 윤미령의 공을 치하했다.


음식상이 나가고 밤이 깊어지자 윤미령이 아이들을 살펴보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검은 나비가 목소리를 낮추어 자신들이 상해를 향해 가는 중임을 알렸다. 그리고 평양의 유지인 조원구가 상해의 임시 정부에서 쓸 자금을 대줄 수 있는지에 관해 물었다. 청을 하는 검은 나비의 얼굴에 절실함이 보였다.


조원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경제적 결정권은 아내가 쥐고 있으니 함부로 답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검은 나비에게 자기의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어 어찌해야 좋을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집사람이…….”


조원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으리 마님께서 따로 여자 손님을 좀 뵙고 싶어 하십니다.”


순간 조원구는 난처한 자신의 상황을 기가 막히게 알고 끼어든 아내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미령은 대뜸 본이 앞에 가방 하나를 내밀었다.


“금입니다. 그만하면 우리 바깥양반의 마음을 전할 만한 양이라 생각됩니다. 따지고 보면 그 한심한 장가 놈한테서 벗어나게 해 드린 대가는 내가 받아야 하는 것 같은데 엉뚱하게 내가 보탬을 드리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우리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는 모양입니다.”


미령이 입가를 살짝 치켜들며 웃는다. 검은 나비는 앞에 놓인 가방을 열어 보고 깜짝 놀랐다. 가방 안에는 들기조차 버거울 양의 금이 가득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미령을 바라보자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뜬다.


“저는 원래 뼛속부터 나쁜 년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남 생각하지 않고 가져야 직성이 풀립니다. 내가 여기서 검은 나비를 섭섭하게 돌려보내면 적은 돈을 아끼다 큰 것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더 큰 것을 위해 기꺼이 투자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쓰실 분들이라는 것을 믿고 드립니다.”


본이는 여러 말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라를 위해 쓰일 것입니다. 덕분에 상해에 계신 분들이 한숨 돌리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령의 뒤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가 나쁜 꿈을 꾸었는지 경기하듯 울음을 터트렸다. 놀란 미령이 몸을 돌려

아이의 가슴을 손으로 꼭 눌러 진정을 시켰다. 아이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미령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손을 토닥여 아이를 재운다.


마루 건너편에서 조원구와 유성준이 하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린다. 두 사람은 경성에서 같이 알고 있는 인물들을 거론하며 그들의 근황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미령은 장연수를 따라 이천으로 들어갔던 날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나귀에서 뛰어내릴 때 미령의 눈에 들어왔던 그 집 며느리는 집 밖으로 나가면 당장 말라죽을 것만 같은 그늘 속의 화초 같았다.


그런 여자가 이리 당당한 모습을 보이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이제는 그냥 착하기만 한 여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미령은 사내와 같이 왔지만 먼저 나서는 그녀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남자를 앞세웠다면 미령은 남편이 아무리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 했어도 절대 이렇게 인심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 뒤에 숨는 것들은 절대 돈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떠나자 조원구가 미령의 손을 잡고 물었다.


“당신은 어찌 그리 통 크게 쓰실 생각을 하였소?”


미령이 조원구의 어깨 위에 떨어진 희끗한 머리카락을 털어 내며 대답했다.


“그야 당신을 찾아온 검은 나비인지 이본인지 하는 분이 착한 계집이 아닌 듯해서지요.”


조원구는 도대체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은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령은 이제 할 말이 없다는 듯 서둘러 방으로 들어간다. 곧이어 미령이 빠르게 주판 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원구는 여자들이 하는 말이란 도통 못 알아듣겠다고 생각하며 아들 윤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유모 품에 안긴 윤재가 제 아비에게 오겠다며 손을 벌리고 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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