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행자의 뉴욕 도착기 : 걱정마, 영어는 그냥 하는 거야.
뉴욕으로 아이들과 한 달 살기를 마음먹고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뉴욕 여행 계획 노트를 살 때였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J.F.K 공항으로 향하는 왕복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을 때?
아니면 인스타그램에서 온갖 뉴욕 브이 로그를 밤새워 보며 우리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던 때였을까?
사실 이 여행은 소1, 아니 만 12세 첫째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엄마, 원어민 선생님 있는 학원 말고 학원비 모아서 우리 뉴욕 좀 길게 여행하면 좋겠다!" 그 한마디에 INFP 성향의 내가 이렇게 큰 모험을 결심하다니. 성격상 좋아하는 일에만 계획적인 P형답게 밤새 뉴욕 정보를 수집하고, J형처럼 세세한 준비를 했다. ENTP라고 주장하는 소1(첫째는 소1, 둘째는 소2라고 부르는 건 우리 여행에서의 룰이었다)은 "뭐든 좋아요"라며 웃어넘기더니, 알고 보니 야구에 진심인 야구팬이었다. 이제 와 말인데 실컷 뉴욕 양키스타디움 경기 예매하고 어떤 선수 제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오타니 란다. 어? 오타니도 양키팀이야? 하. 오타니는 LA다저스라고.
반면 만 7세 막내 소2는... "아빠 없이요?" 태어나서 아빠와 떨어져 자본 적 손가락으로 셀 만큼인 아빠 애착형 아이가 한 달이나. 일단 '미국'이라는 말에 겨우 설득됐지만, "워터파크는 언제 가요?"라는 질문을 벌써 수십 번째 듣는 중이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나는 오늘도 "곧!"이라고 대답한다.(스포 유의. 반전은 귀국 이틀 전에 갔다는 것)
이런 우리의 뉴욕행, 과연 순조롭게 시작될 수 있을까?
반전은 출발 12시간 전에 시작됐다. 친구들은 여름방학 전이라 학교에 가는데 자기들은 비행기 타고 여행 간다며 들떠 있던 7세 소2가 갑자기 발열 폭탄을 터뜨린 것. 소아과에서 "선생님... 저희 내일 뉴욕 가는데요..."라는 말에 받아든 처방전과 비상약만 20만원어치.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열 체크하며 기도했다. '제발, 열이여, 더 이상 오르지 말아다오.'
인천공항에서 아빠와 작별할 때쯤, 드디어 평상시 컨디션으로 돌아온 소2를 보며 안도했는데... 하늘 위에서 시작된 두 번째 반전. 13시간 비행 동안 기내식을 거부하고(키즈밀을 따로 신청해서 받았는데요?!) 단식 투쟁을 선언한 것. 4시간마다 벌어지는 '젤리 다섯 개로 항생제 먹이기' 대작전과 씨름하는 동안, 옆자리의 소1은 "엄마, 나는 오프라인 유튜브 저장한 거 보면서 잘게~" 하며 세상 편안. 기내식도 말끔히 먹는 최강프로여행자. 뉴욕 미술관 가이드북은 가방 깊숙이 처박힌 채, 약 타임 테이블만 들여다보며 태평양을 건넜다.
그렇게 도착한 뉴욕은 시간 여행의 시작이었다. 7월 22일 아침 9시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또 7월 22일 아침 11시 5분.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 같은 이 묘한 기분을 만끽할 새도 없이, 입국심사장의 긴 줄이 우리를 맞이했다.
'제발 웃는 3번 심사관님 앞으로...' 간절히 기도했건만, 무표정의 17번 심사관님께서 손짓. 예상 질문 완벽 대비했다고 자부했는데, "왜 한 달이나 있냐"는 질문에 'for a trip'만 백만 번쯤 반복하다가 식은땀만 흘리고 있을 때, 옆에서 터진 소1의 당당한 한마디.
"She is a government officer in Korea!"
어? 이게 웬일? 순식간에 도장 쾅. 통과됐다고?
"엄마, 영어는 그냥 하는 거야. 뜻만 통하면 되지. 내 덕에 통과했잖아."
12살의 당당함에 어깨가 처지는 순간이었다. (근데 너 진짜 막 아무말 대잔치 느낌적 느낌인데 말이지…)
J.F.K 공항의 첫인상은 충격적. 이게 정말 뉴욕 맞아? 그 화려한 뉴욕의 관문이 이렇게 소박하고 낡은 느낌이라니. 편의점에서 음료수 둘, 초콜릿 하나에 15달러 30센트라는 첫 번째 가격 충격. 그렇지만 일단 카드 내밀기.
퀸즈로 향하는 길, 젠틀한 한인 택시 기사님의 조심스러운 한마디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거기... 친척 있으세요?"
"아니요, 에어비앤비로 예약했어요. 맨하튼은 너무 비싸서..."
백미러로 보이는 기사님의 걱정스러운 눈빛.
큰 묘지 구역을 지나가는 동안 커지는 불안감. 소2는 연신 "여기가 진짜 뉴욕이야?"라고 물어보고, 나는 "그럼, 당연하지~"라고 억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소1은 이미 곯아떨어져서 코까지 골며 평화로운 꿈나라로.
드디어 도착한 숙소. 3중 쇠문에 달린 열쇠 세 개를 보고 놀란 가슴을 부여잡다가, 2층으로 향하는 가파른 나무계단을 보고 재차 충격. 22.8kg짜리와 10kg짜리 캐리어를 번쩍 들어올리며 깨달았다. 아, 내가 몰랐던 역도 재능이 있었구나. 다행히도 방 안은 깔끔했고, 인도계 미국인 호스트는 우유, 물, 시리얼, 커피까지 준비해 두었다.
첫 끼니를 위해 나선 동네 마트까지의 길은 또 다른 도전.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한산한 거리를 따라 걸으며 발견한 구글 지도 라이브 뷰의 신세계. 이것만 있으면 길은 안 잃어버릴 것 같은 작은 위안.
장보기 79달러의 두 번째 가격 충격을 겪고 돌아와 만든 첫 식사.
"엄마, 이 고기 너무 질겨..."
"우유도 이상해..."
"그래... 누룽지나 끓여먹자..."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뉴욕 첫날. 드라마에서 본 그 화려한 뉴욕은 어디로 숨은 걸까? 알고 보면 이것도 뉴욕의 또 다른 얼굴이겠지. 한 달 동안 우리는 과연 어떤 뉴욕을 만나게 될까? 아이들의 얼굴에 피어난 설렘과 걱정이 교차하는 표정을 보며, 이 여정이 우리에게 남길 이야기들을 상상해본다.
[첫인상 인터뷰]
12세 인터뷰
- 뉴욕에서 가장 먼저 본 게 뭐였어(첫 날 인상깊은 한 장면)?
: 500ml 콜라가 5000원인 뉴욕 물가 ㄷㄷㄷㄷ
(나도…뭔가…가격 볼 때마다 이게 맞나 그랬다…)
(소1: 엄마~내가 자는 줄 알았겠지만, 다 보고 있었다. 숙소갈 때 분위기 별로 안 좋아서 자는 척 한거임)
- 인스타나 영화에서 본 뉴욕이랑 실제 뉴욕은 어떻게 달라?
: 생각보다 할렘이 위험하지 않았다.
(이 뜻밖에 대답은 뭐노..?)
- 지하철 타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밤이 되면 노선이 바뀐 것.
(그래서 우린 밤 10시 지하철에 경찰이 백명쯤(오버인가?)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었지….)
- 첫날밤 우리 숙소 어땠어?’
:무난~굳, 편안하고 넓어서 good!
(엄마는 너네가 걸어다닐 때마다 나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서 호스트 집에서 시끄러울까봐 내내 층간소음 같은 걸 걱정하며 잔소리했었지…)
7세 인터뷰
-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뭐가 제일 신기했어?
: 줄이 길어.
(소2야…너도 좀 길게 대답하면 안 되겠니?)
- 지하철에서 왜 아빠한테 전화하자고 했어?
: “아빠 차 타고 오면 않되?”-아빠가 보고 싶어서
(음….집에 가고 싶은 건 아니였고? 우리 비행기 타고 여기 왔는데…아빠가 어떻게 차를 타고 오겠니….제발 그만 좀 징징…음….엄마 목소리가 혹시 커졌니? 미안)
- 뉴욕의 냄새는 어떤 냄새 같았어?
:썩은 달걀?
(인정, 그것보다 더 이상한 냄새였지만, 희한하게…또 안 나는데도 있었지. 넌 왜 우리는 왜 그곳에다 숙소를 안 정했냐 말했지. 엄마는 아무말도 안 했지.)
- 첫날 밤 무서웠어?
:길이 어두워서 무서웠어.
(아니…우리 첫날밤에 잘 때..불 껐을 때…아니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