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사람들이 사는 법

퇴사일지 3

by Juas


잠이 많아졌고 늦게 일어난다. 지난 십년간 새벽형 인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7-8시간은 자야 개운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일이 잘 된다. 그간 새벽에 일어나 뭐라도 해보려고 애쓸 수 있었던 건 그나마 회사가 정해둔 9-6시 업무시간이 하루 루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어서였던 것 같다. 새벽형 인간 만들기에 거듭 실패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 나는 오후형 인간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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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해진 생활 리듬에 그래도 한 가지 꼭 지키고자 하는 건 운동이다. 일어나 커피 한 잔에 사과 한 알 먹고 정신 차리고 나면 열두시, 그즈음 헬스장으로 간다. 생긴 건 아령 하나 못 들고 러닝머신이나 뛰고 올 것처럼 생겼는데 무게도 잘 치고 자세 좋다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트레이너에게 종종 듣는다. 요즘엔 사라진 가슴과 엉덩이 살리기에 주력하고 있고 다음날 어기적어기적 걸어야 할 정도로 아프면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정말 좋다. 아니면 몸이 너무 놀란 걸까. 오늘도 화들짝 놀란 트레이너가 달려와 자세를 고쳐주고 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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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가끔 촬영을 하러 간다. 월급과 주식 말고는 돈 버는 방법을 아직 잘 모르겠다. 월급도 없고 테슬라의 주가가 폭락한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고민하다가 이내 ‘하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라는 결론만 내리기 수백 번. 다른 방법은 딱히 떠오르질 않는다. 나의 강점은 공든탑 무너뜨리고 다시 쌓기. 그런데 이번엔 너무 많이 무너뜨려서 눈과 손목이 좀 시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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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촬영을 간 곳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행복한 메시지로 가득 찬 그곳이 마치 이상한 종교단체처럼 느껴져서 빨리 뛰쳐나오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행복을 강요당하는 기분이랄까, 나는 대체로 우울하고 가끔 행복한 지금의 상태가 가장 편안한데 말이다. 어쩌면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에 더 집착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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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에 다녀와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예약했던 상담을 취소했다. 어쨌거나 지금은 내가 내는 낮은 음계의 소리가 가장 편안하니까. 높고 경쾌한 음은 없지만 내 삶엔 온화한 공기가 흐른다. 이 삶이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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