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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장 Apr 21. 2019

[단편소설] 너를 결혼시킬 초능력 #1

전 여친들을 모두 결혼시킨 그의 제안

“그럼 내가 한번 사귀어 줄게.”

연남동 삼겹살집에서 지훈이 삼겹살을 뒤집던 집게를 내려놓으며 유나에게 선심 쓰듯 한 말이었다.

“야, 뭔 소리야? 미쳤어?”

유나가 흘겨보며 물었다.

“어허. 난 지금 널 결혼 압박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하는 건데, 그런 눈빛을 보내면 쓰나.”

“내가 너랑 왜 사귀냐고. 좋게 말할 때 그만해라”


지훈은 유나의 최근 이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유나는 3년 정도 만난 남자친구와 진지하게 서로가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곤 했으나, 남자친구에게서는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가고 유나는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나와 미래를 계획하고 있냐고. 유나의 남자친구였던 사람은 아직 자신이 결혼할 때도 안됐고, 책임이 가중되는 영역으로 굳이 지금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 


유나는 질문을 하나 더 했다. 그럼 나중에는 나랑 결혼할 생각은 있어? 그 때까지 널 사랑하고 있으면 해야지. 남자친구의 대답이었다. 그 질문과 답변 이후에 둘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겼다. 헤어짐은 금새 찾아왔다.


“하여간 걔는 나쁜 새끼야.” 유나가 소주잔을 드는 동시에 말했다.

“좋은 놈은 아닌 것 같아” 지훈도 잔을 들어 윤아의 잔에 부딪힌다. 둘은 잔에 담겨있던 소주의 반만 마신다.


“나는 비혼족도 아니고 딩크족도 아니야. 너무 늦지 않게 결혼해서 달달한 신혼도 보내고 싶었고, 지금은 노산의 부담 없이 나와 아기 모두 건강하게 출산하고 싶어. 그런데 저 새끼 기다리다가 나이만 먹고, 그 때 또 헤어지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결혼생활에 제 때 진입하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보낸 꼴이 될거 아니야. 그래서 헤어지는게 낫다고 판단했지” 유나는 소주잔을 그대로 손에 들고 남아있는 소주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사귀어 준다고 한거야” 지훈이 말했다.

“너 오늘 왜 이러냐.”

“내 연애 히스토리 알잖아.”

“뭐였더라? 전 여친이 너랑 헤어지고 다음에 만난 남자랑 결혼했다는거?” 유나는 기억을 캐내는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는 그것만 말했어?”

“응. 아마도?”


“전 여친 뿐만이 아니야. 전 여친까지 합해서 내가 그… 8명 만났거든. 근데 이 전 여친들이 하나같이 나와 헤어진 담에 바로 다음에 사귄 남자랑 결혼까지 하더라고. 짧게 만났든 몇 년을 만났든 관계없이. 신기한게 나도 어릴 때 만난 여친들이 있을거아냐. 그때는 전 여친들도 진짜 결혼적령기가 아니었는데도, 결혼을 하더라고.” 지훈이 잔에 남아있는 술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진짜? 으하하하핫. 꺄하하하하하” 유나가 시원하게 웃었다.


“세번째 정도까지는 그냥 우연이겠거니 했는데, 다섯번을 넘으니까 이건 나에게 초능력이 있는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지. 전 여친을 결혼시키는 초능력. 일곱번이 됐을 때는 거의 확신했고, 여덟번을 기록한 지금은 확실히 초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뭔 초능력이 그래? 자기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랑 결혼하게 되는 초능력도 아니고, 무슨 전 여친들을 그렇게 시집보내고 그래. 크크크큭. 흐하하하하.”

“진짜 쓸데없지 않냐. 미인을 얻는 초능력도 아니고. 큭큭큭“ 지훈도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웃었다. 그리고 둘은 소주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 남은 술을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은 유나는 창밖에 있는 나무를 바라봤다. 늦봄의 나무들은 연두색 잎을 힘차게 싹 틔운 후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 유나는 이때가 가장 좋다고 말했다. 길고 황량한 겨울을 지나 저마다 생명력을 뽐내는 이 순간이 아름답다고. 아마 지금도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은 지금 어디쯤 와있는가 라는 생각도 함께. 봄인가 여름인가 가을인가 겨울인가.


“너 아직 대답 안했다?” 지훈이 말했다.

“응? 뭘…?”

“내가 너랑 사귀어 주겠다고 했잖아. 넌 좋다싫다 말이 없었고”

“뭐야. 농담아니야?” 유나가 말했다.

“농담 아니야”


“야 우리가 동기로 만나서 지금 거의 15년이 지났는데, 연인이 될 사이였으면 진작 됐겠지, 왜 이제와서 뒷북이여” 유나가 팔짱을 끼며 자세를 뒤로 젖혔다.

“뒷북이 아니라 지금이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해”

“아니 나 오늘 삼겹살 먹으러 나왔는데 너가 갑자기 그러니까 당황스럽잖아. 그리고 그동안 널 몰래 좋아해왔어. 나와 만나주지 않을래도 아니고 시혜를 내리듯이 사귀어줄게가 뭐니 사귀어줄게가. 이 거만함 뭐냐고” 유나가 말했다.


“결혼하고 싶다며?” 지훈이 물었다.

“그렇지”

“나랑 사귀다가 헤어지면 결혼 바로 한다니까? 내 입장에선 은혜를 베푸는건데 그 정도는 너가 이해 좀 해주라”

“너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그럼 그냥 나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준다는 거잖아. 넌 왜 그러고 싶은건데?” 유나가 말했다.


“넌 내가 정말 아끼는 친구고, 정말 좋은 사람이잖아. 난 그런 사람이 힘들어하는 모습 보기 싫어” 지훈이 말했다.

“아…난 너랑 친구 이상의 관계로 넘어가는걸 생각 못해봤는데”

“아니 앞으로 쭉 그렇게 가자는게 아니야. 당분간 연인으로 지내다가, 2개월 정도 만나고 헤어지면 다시 친구로 돌아가자는거지. 깔끔하게.”

“2개월은 어떻게 나온 기준이야?” 유나가 물었다.

“내가 시집보낸 전 여친들 중 가장 짧게 만난 친구가 2개월 만났었거든. 이걸로 생각을 해보면 내 초능력이 발휘되는데까지 최소 2개월은 있어야 된다는 얘기지”

“치밀한 놈이군”


“손해볼거 없잖아” 다 익은 고기를 집게로 집어 유나쪽으로 놓으며 지훈이 말했다.

“왜 없어? 너랑 나랑 그 후엔 지금 같은 친구관계를 유지도 못할 수가 있다고”

“잠깐만, 잠깐만. 너 지금 좀 뭔가 좀 너 혼자 멀리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지금 너가 좋아죽겠어서 그런게 아니라 널 구원하기위해 돕는 거라니까. 나도 너만 시집보내면 나도 그냥 너랑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흠”

“음”


유나는 기묘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술기운 때문인지 재미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유나는 소주병을 들어 지훈의 잔을 채웠다. 지훈도 유나의 잔을 채웠다.


“어떡할래?” 지훈이 잔을 들어 유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유나도 자신의 잔을 들어 지훈의 잔에 부딪히며 말했다.

“그래. 2개월만 사귀어 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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