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대로 걸어가며, 나는 당신의 바람대로 나아가고 있다
아빠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 집 신발장에는 함께 찍은 가족사진 액자가 몇 개 놓여 있다. 얼핏 봐도 옛날 사진 티가 나는, 2000년대 초의 사진이다. 가끔 그곳에서 아빠의 얼굴을 본다. 공부하다 어둠 속에 돌아온 어느 날도 그랬다. 밤이 깊었던 터라 엄마와 동생은 모두 자고 있었다. 고요한 적막감에 액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사진의 배경은 여러 곳이었는데, 한 장소는 놀이공원이었다. 나는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샐쭉한 여섯 살 여자아이였고, 동생은 이제 막 돌이 지난 갓난아기의 모습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했을 엄마는 젊고 예쁜 아가씨였다. 갈색으로 염색한 장발의 머리가 허리까지 닿았다. 아빠는 우리 모두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내 기억 속 아빠는 늘 배가 나온 아저씨였는데 그 사진 속에서는 아빠도 말라 보였다. 메고 있던 여러 작은 가방은 나와 동생의 것이었다. 티끌 없는 그의 미소가 유독 해맑았다. 그 옆에는 강원도 바다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놀이공원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이었다. 동생도 훌쩍 커 초등학생이 되었고, 중학생이던 나는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는 티셔츠로 한껏 멋을 냈다. 우리의 패션을 차마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으나, 엄마와 아빠의 옷도 지금 보면 촌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엄마와 아빠, 둘만 팔짱 끼고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엄마의 표정이 담겨있었다.
한참을 서 있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시간의 변화가 느껴졌다. 사진 속의 나도, 엄마도, 동생도 모두 추억 속 한 장면에 불과하다. 나이를 먹은 우리는 다른 모습과 다른 표정을 지니고 동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 옆에 아빠는 없었다. 주름지고 희끗한 그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미친 듯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빠의 사진을 살폈다. 그의 현재 모습을 찾고 싶었다. 찾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시간은 그에게만 다르게 흘렀다. 그는 머무른 시간 안에서만 존재했다.
아빠에 대한 회상은 주로 엄마가 인지하는 모습에 기댄다. 그는 유쾌한 모범생이었다. 스무 살부터 쉬지 않고 일해온 능력 있는 직장인이었고, 두 딸의 아빠이자 자신의 가정과 친가에까지 책임을 다하는 4남매의 맏형이었다. 그는 할머니와 동생들을 살뜰하게 챙겼다. 밤샘 근무를 끝내고 온 직후에도 시간만 생기면 우리를 데리고 남부럽지 않을 만큼 여행을 다녔다. 그는 인간관계도 넓었다. 술도 좋아했는데, 술자리에 아빠가 있다는 사실이 친구들에게는 아내에게 내밀 수 있는 프리패스 카드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누구에게나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다채롭게 살았던 그이지만 가끔 엄마를 통해 그의 과거까지 듣다 보면 나는 그 삶의 굴레에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아빠는 꽤 이른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그가 학생이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아빠 밑으로만 세 명이 되는 동생을 홀로 힘으로 다 책임질 수 없었다. 아빠는 공부를 잘했고 공부에 욕심이 있었으나 달리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당장 할머니께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17살이 되던 해, 그는 고향인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가 철도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기숙사비와 학비가 모두 지원되어 돈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아빠는 그곳을 졸업한 직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쭉 철도 공사에서 일하셨다.
그런데 철도고등학교에서의 첫 시험 날, 아빠는 돌연 버스를 타고 혼자 전라도로 내려가 버리고 만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서 말이다. 그곳은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쳤고 그는 탐구하는 분야에 눈빛이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다른 공부가 있었다.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건 그 상황에 그가 부릴 수 있는 최선의 발버둥이자 어리광이었다. 할머니는 그런 아빠를 다시 서울로 올려보냈다. 이후 같은 일이 반복되지는 않았다.
시간은 훌쩍 지나 내 기억으로 넘어온다. 한 직장에 30년을 근속한 아빠의 가방에는 늘 책이 있었다. 당시 베스트셀러부터 고전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다. 그는 배움을 지속하고자 방통대에 등록했다. 일로 인해 학기를 쉬어가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시험 기간에는 퇴근 후에도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했다. 다음 날 아침에 시험을 앞둔 중학생인 나보다도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다. 방에 앉아있는 아빠의 넓은 등과 책을 비추는 한 줄기의 조명이 그가 내게 보여준 모습이었다. 엄마가 그랬다. 아빠는 공부에 한이 맺혀서 평생을 공부하고 싶어 한 사람이라고. 공부를 다 하지 못하면 자신은 무덤에서도 공부할 거라고 했었다고. 그의 사고 소식은 방통대 4학년 마지막 학기를 앞둔 즈음이었다. 그는 끝내 대학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아빠만큼 공부에 대한 열망이 크지는 않았던 아이가 대학 합격증을 받았다. 나는 학문을 공부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지만, 세상을 알아가고자 하는 호기심은 가득했다. 자리에 앉아 글로 이해하기보다 직접 부딪히면서 습득하고 체화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한없이 세상으로 뻗어 다녔다. 만나는 사람들의 경계와 경험한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간혹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에게 후회 없이 사는 것 같아 부럽다는 말을 들으면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가 지금 내 모습 보면 많이 대견해할 텐데. 나 그때보다 키도 훨씬 많이 컸고, 예뻐졌고, 어디 가서 칭찬도 많이 받는데. 핑계만 대던 어렸을 때와 다르게 하고 싶은 걸 독립적으로 해나가는 내 모습 보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반면 우리를 키운 엄마는 이와는 정반대의 성향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그녀에게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는 내 방식은 걱정투성이였다. 매번 충동적인 선택으로 삶을 꾸려가는 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칭찬이나 응원의 말도 들은 적이 없었다. 반대하더라도 할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게 엄마에게는 최선의 지지였으리라. 나의 내면에는 늘 그녀에게 좋은 딸이 아니었다는 무언의 죄책감이 깔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동생에게 에둘러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빠가 자유롭게 살지 못했던 걸, 네 언니가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 같아.”
내 이름은 아빠가 지어주셨다. 지원, 갈 지(之), 원할 원(願)을 쓴다. ‘원하는 대로 가라’는 뜻이다. 사람의 이름에는 갈 지 한자를 잘 쓰지 않는다고 하던데. 첫 아이의 이름에 가라는 의미를 담은 그의 심정을 나는 잘 헤아릴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은 나의 이름 뜻을 들으면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너무나 내 이름이라고. 나라는 사람 자체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고.
나는 차근히 아빠의 바람대로 크고 있다. 당신의 바람대로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