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소개팅으로 만나 몇 번의 데이트를 하고 벚꽃 나무 아래에서 '사귀자'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고민해 보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몇 번을 더 만나는 동안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고, 저는 궁금했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촌호수를 산책하며 아내에게 '고민해봤냐'라고조심스레 물어봤고, 이번에도 아내는 '아직도 고민하고 있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두 가지 감정이 마음속에 들더군요. 먼저 '무슨 애가 고민을 이렇게 오래 하나..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 그런데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 마음을 못 정해서 불편했을 텐데.. 계속 물어봐도 차분하게 대답하네.'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부정적인 감정, 불편한 마음을 담백하게 말하는 능력이 없는 제게 그런 아내의 모습에서 '이상형'을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Yes'라고 말하지 않는 아내가 너무 좋았던 거죠.
그래서 아내에게 물어봤습니다. "장바구니에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있니?" 그랬더니 아내가 "네?? 아.. 아니요.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럼 괜찮아. 계속 고민해" 라며 나머지 호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우리는 연인이 되었습니다.
오래된 관계는 부정적, 불편한 일이 없는 관계가 아니라 부정적, 불편한 일을 잘 처리해 본 경험이 있는 관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치 독감에 안 걸려본 사람이 독감 없이 겨울을 보낼 확률보다는, 백신(불편한 사건)을 접종받은 사람이 건강하게 보낼 가능성이 높은 것과 비슷하지요.
나중에 아내에게 왜 그렇게 뜸을 들었냐 물어보니 '사귀면 결혼할 것 같아서' 고민을 오래 했다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