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대화하기 XV
지난 글에 이어 근 한 달 만에 책을 열었다. 흥미로운 두 개의 개념으로 시작한다. 실체와 정체.
내가 개발자 출신인지라 Identity 하면 정체성보다는 식별 혹은 식별자가 익숙하다. 그런데 정체성이라니?
생소하지만 흥미롭다. 책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은 못하지만.
정체에 대한 이해는 자각을 바탕으로 하는 까닭에 다양한 개별적 차이를 낳게 되어 소통이 어렵다.
근래 들어서야 깨달은 경험에 대한 명료한 설명이다. 박태웅 의장님이 어느 글에선가 말씀하신 대로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깨달음. 몇 년 전에 내가 입에 달고 산 말 중에는 '우리가 하는 대화의 대략 80%는 오해라고 봐야 한다. 그러니, 굳이 오해를 없애려고 과하게 에너지를 쓰지 말자.'라는 표현이 있었다.
더불어 중국에서 배운 개취인정의 경험과 교훈이 스쳐 지나간다. 그나마도 대화 상대의 개성을 고려하며 그런지라 그나마 일대일로 대화를 하면 소통이 조금 나아지긴 한다.
또다시 무릎을 칠만한 표현이 등장한다.
모든 이해는 욕망에 기초하여 실체적이면서 정체적인 성격을 지니는 실체/정체의 형태로 존재한다.
내가 진정한 자유에 대해 깨달은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처럼 설파했던 바로 그것은 '자기 욕구'에 대해 솔직해지라는 점이다. 집단을 중시하는 한국 개신교에 속한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역구를 억누르고, 교회 집단이 요구하는 행동양식에만 매달리는 모습이 답답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그리고, 작년에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일이었던, 회사 후배에게 올해는 너의 욕구를 찾기 위해 노력하라는 조언이자 지시도 떠오른다.
처음 듣는 설명인데, 저자(최봉영 선생님)는 마음을 지각과 생각으로 양분한다.
인간은 마음을 지각과 생각으로 구분
지각은 개나 돼지에게도 있고, 생각은 인간에게만 있어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이라 주장한다.
와우, 문화를 이렇게 해석하다니!
인간이 문화를 형성하고 실현하는 것에는 실체의 세계와 정체의 세계가 통합되어 이루어진다. <중략> 인간이 실체적 존재이자 정체적 존재로서 문화를 디자인한다
이 부분을 읽는데 박문호 박사님이 인간(생물)과 문화의 공진화를 설명한 부분과 어딘가 연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리고,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표현하는 고래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부 수긍하게 해주는 설명이다.
아래 구절은 도올선생의 노자 강의와 책에서 배운 개념적 사유의 폐단과도 연결된다. 늘 그러한 도의 구현!
정체는 실체를 통해서 표현되기 때문에, 실체적인 육신이 죽으면 정체인 정신 또한 소멸해 버린다.
12쪽 남짓을 읽고 무언가 깨달았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간의 경험에서 온 사유를 정리해주시는 듯한 최봉영 선생님의 정교한 논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최봉영 선생님이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를 쓰신 동기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