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바다에서 거친 파도를 길들인 듯 자연과 친구 되어 물 위를 나는 모습이 너무 자유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육지로 꽉꽉 둘러싼 대구 토박이에, 애 둘 딸린 유부녀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아 마음에만 꾹꾹 담아둔 꿈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온통 바다에 둘러싼 제주도에 있다.
심지어 백수 상태이며,
돌봐야 할 아이들도 매일 어린이집을 나간다.
바다와 시간이 넘치고
한낮 기온이 29도에 육박하는 바로 오늘!
이보다 서핑하기에 완벽한 타이밍은 없다.
제주살이를 처음 계획할 때부터 내 버킷리스트 1순위였던 서핑. 기다려라♡
서핑에 그닥 관심이 없는 남편을 데려가기 위해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주시하였고,
날씨가 좋을 날에 사전예약을 해 남편의 변심을 조기에 차단하였다.
남편은 내 성화에 못 이겨 따라가 주면서도 내심 내가 서핑 첫 경험에 실망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함께 길을 나섰다.
월정리에서 아침 10시 첫 타임!
아이들을 9시에 등원시키고 남원의 어린이집에서 월정리까진 1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조급한 마음으로 차를 밟는다.
물속에서의 활동은 워낙 에너지 소모가 큰 운동이기에
급한 대로 스타벅스 샌드위치와 커피를 우걱우걱 먹으며
간질 복잡한 기분을 느낀다.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 왜 이런지 내 감정인데도 잘 모르겠는데
너무 기대해 온 순간에 다다르려 하자 기대감과 함께 막상 별로면 어쩌나에서 오는 걱정도 조금 있는 것 같고,
경험자들이 처음엔 엄청 어려워 보드 위에 서 있는 것도 못한다고 말하는 여러 무용담들로 인한 긴장도 있고,
그리고...
실제 퇴사일에 맞춰 어제 올라온 회사 면직 공고에 놀란 동기들의 여러 반응들
-이직이 아닌 그냥 퇴사에 대한 당황, 놀라움, 응원, 걱정 등등..-
그게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인다는 것과
신경 쓰는 나 자신에 대한 언짢음까지..
뭔가 하나로 꼬집어 설명하기 힘든 여러 생각과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여 멜랑꼴리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정시에 맞춰 겨우 교육장에 도착하였다.
입장하자마자 카운터에서 A4용지 한 장 가득한 주의사항을 읽고, 동의서를 작성 후 이론수업이 먼저 시작되었다. 이론수업장이 따로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전체적으로 동남아 휴양지스러운 감각적인 인테리어였다.
뭐든 잘해야 하는 완벽주의자 남편은 이론도 열심히였고, 나는 휴양지 무드가 주는 들뜸에 왠지 머-엉한 상태였다.
이론 후 조금은 낡은 대여 슈트를 착용하고, 바다로 실습교육을 나갔다.
아까의 여자 강사에서 실습은 남자 강사로 바뀌었다. 여강사가 건강한 느낌의 려원이었다면, 남강사는 서강준 느낌에 둘 다 구릿빛 훈남훈녀들이었다.
본격 실습 전, 관광객들이 주 고객이어서인지 '사진촬영'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입수 전 비치에서 보드와 한 번, 바다에서 보드 타는 모습 한 번씩 전문 카메라로 정성껏 촬영해 주는 점이 그냥 흘러가버릴 수 있을 소중한 경험을 나 대신 잘 담아주어 너무 좋았다. 사실 사진은 남기곤 싶은데 찍는 게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나는 대게 사진보단 현재에 집중하는 걸 택하는 편인데, 그 수고를 대신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실전 강의 진행순서 :
1차)모래 위에서 연습→ 2차)바다 위에서 보드를 고정한 채로 자세 연습→ 3차)보드를 밀어주며 실전 서핑
보드 위에 엎드려 파도를 기다리다 라이딩할 타이밍을 만나면 '푸쉬-원-투-업!' 순서로 균형을 유지하며 보드에 몸을 싣어야 한다.
근데 그게 말이 쉽지, 일어선 채로 1초 유지하기는 커녕 제대로 일어서기도 전에 풍덩~! 입수하기 바빴다. 그렇게 무한 입수를 반복하며 연습을 계속하자 이론은 오히려 잊혀지고, 점점 몸이 자동으로 균형감을 익히게 되면서, '푸시 후 바로 업'으로 연결되어 갔다. 보드 위에서 서있는 시간도 1초-3초-10초로 점점 길어지는 자신이 너무 놀라웠다. 특히, 딱 두 번이었지만 파도를 잘 만나 해변 끝까지 미끄러져 나갈 때의 기분은 와 그냥 '째진다'라는 표현이 직관적으로 먼저 떠올랐다. 남루한 표현력으로 조금이나마 더 비슷하게 설명을 해본다면, 구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로질러 달리는 에로스가 된 기분이랄까.
꿈과 현실 사이 어딘가의 수다맨
총 2시간 동안의 스파르타 교육 후, 나중에 알았는데 한 타임에 2명만 교육하는 건 추가요금을 내야 가능한 소수인원 교육으로 이는 집중 교육받을 수 있는 행운인 동시에, 혹독한 단기 속성 코스였다. 다음 타임만 봐도 수강생이 6명이라 자기 차례까지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3시간 강의시간 동안 라이딩을 해볼 기회가 우리의 1/3로 줄었다.
넋 가출
2시간 교육 후 자유시간 1시간 동안은 우리끼리 연습을 하는데,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지자 언제 어떤 파도에 올라야 할지를 몰라 헤매고, 체력도 다 떨어져 어영부영 시간이 지났고, 보드를 반납하기 위해 바닥난 체력을 끌어모아 보드를 힘겹게 끌고 나오다 거의 물밖로 나오기 직전 둘 다 힘이 빠져 동시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들자 에메랄드빛 옅고 찐한 그라데이션 바다가 보였다. 적당히 쨍한 가을 태양 빛, 맑개 개여 새파란 하늘 속 한껏 탄력 있는 흰 구름들.
그리고 발가락에서 엉덩이까지 간지럽히며 밀려들어오는 투명 미꾸라지 같은 파도들.
광활한 광폭의 해안 전경 가득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우리는 알 수 없는 울컥함을 느끼며 감히 카메라에 담기지 않을 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받아들였다.
서핑하는 동안엔 보이지 않았던 지금 서있는 곳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과
지구엔 이렇게나 아름다운 자연이 존재하고 있어 왔고, 나는 이를 잠시의 휴가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생명체 중 하나로서 함께 구성될 수 있다는 게 새삼 다시 실감이 나고 감사하였다.
샤워 후 탈의를 완료 후 교육장에서 나온 우리는 휘몰아치는 허기를 느끼며 음식 메뉴를 고를 여유조차 없어 바로 옆 햄버거집으로 달려간다. 서핑하곤 꼭 '빅 웨이브' 맥주를 마셔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며, 굶주린 짐승의 눈으로 흡입한다. 맥주도 버거도 처음 먹는 메뉴가 아님에도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역대급 맛을 느끼며 감자튀김까지 밀크셰이크에 찍어 끝짱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