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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리 Nov 05. 2023

16. 한국에서의 두 달 - 집으로.

대한민국

치앙마이 떠나는 날

치앙마이에서의 두 달 살기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큰 배낭을 메고 대구에 있는 부모님 집에 도착하니 쿠알라룸푸르에서 DHL로 보낸 상자가 그대로 방구석에 놓여있었다.


'저 안에 뭐를 넣었더라....'


물건이란 게 항상 그렇다. 가지고 있으면 꼭 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 대부분 없어도 괜찮은 것들이다. 분명 고심 끝에 한국행 박스 안에 넣었던 물건들인데, 두세 달 동안 정작 불편함도 못 느꼈고 도대체 저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기억도 가물 가물했다. 이렇게 짐을 싸고 풀고 정리할 때마다 '물건'에 대한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된다.

안녕 잘가

그 연장선으로 한국 집에 도착하자마자, 중고등학생 때 쓴 일기장이 들어있는 사과 박스를 처리했다. 그 사과 박스는 내 보물 1호였다. 두바이 회사의 입사가 확정되고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책상 서랍 하나를 가득 채우던 있는 일기, 사진, 편지 등을 모두 모아 빈 사과 박스 안에 넣고 테이프로 칭칭 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내 이름을 적고 만지지 말라는 경고까지 덧붙인 후 침대 밑 깊숙하게 그 박스를 집어넣고 나서야 집을 떠날 수 있었다.


그 보물 1호(즉, 학창 시절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들어있던 기록- 중2병 포함)와 이틀에 걸쳐 이별을 했다.

과거를 보관하는 게 옳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차분히 앉아 사과 박스 속 나와 조우하니 아무래도 우리가 동시대에 친해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쓴 것이 분명한 활자들이지만 오늘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모습. 하지만 그보다 이미 그 시기를 지나오고 품어온 내가 여기에 있으니, 굳이 물건으로 지니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과거보다는 지금이, 그리고 앞으로가 더 중요하기에 시간을 들여 잘 이별한 것 같다. 마음이 많이 홀가분해졌다.

엄마와 산책하던 수목원

한국을 떠나 내 몫을 살아보기로 결정한 지 7년이 지났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한국에 오긴 했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한국에서 머무는 건 대학 졸업 후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집에 오는 게 흡사 여행 혹은 휴가 온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는 특히 엄마와 시간을 많이 보냈다.


딸들이 크면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고 한다.

엄마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도 있는 딸을 아주 오랫동안 타지로 보냈다. 무뚝뚝하고 연락도 잘 안 하는 딸, 그래도 대구 집에만 가면 다른 건 몰라도 끝내주게 맛있는 집밥 하나는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타지의 시간이 힘들 때 그 사실이 많은 도움이 됐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다 때려치우고 대구 집에 가서 맛있는 밥을 먹는 것이니 별로 무서울 게 없었다.


엄마가 해주는 맛있는 밥을 먹고, 나는 늘어지게 낮잠을 자거나 곧 미국으로 떠날 친구와 소풍을 가거나 커피 한잔을 마시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매일 돗자리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본다.

이 시간에 이렇게 조용하게, 볕을 쬐며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평온하고 호사스러울 수가 없다.


그 해 봄은 유난히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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