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인 나는 3학년 선배의 도우미를 하게 되었다. 3,4,5 학년 선배들은 학기 말에 모형과 설계 콘셉트와 도면이 담긴 설계 패널을 만들어 전시를 한다. 이 때 1,2학년들은 선배들을 도와 큰 모형을 만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도우미를 하기 전부터 나는 기대에 들떴다. 1학년이기에 그렇게 큰 대지 모형을 만들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여러 재료를 써서 건축 모형을 만들어보지도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도 전혀 몰랐을 때였다. 나는 어떤 선배의 도우미를 하게 될까 궁금하던 중에 결정이 났다.
내가 도우미 한 선배는 설계 에이스라고 불릴 만큼 학교 내에서 유명했다. 이 선배를 도와 내가 무엇을 하면 될까, 시작 전부터 설레었다. 하지만 그 선배는 나와 정 반대의 성향이었고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것 투성이었다. 선배는 낮 시간 동안엔 쉬거나 자거나 아이디어 드로잉을 하다가 어두워지면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했다. 밤에 취약한 난 선배 도우미를 하며 일상패턴이 바뀌어 무척이나 힘들었다. 선배는 모두가 인정하는 깔끔한 칼질을 자랑하는 섬세한 사람이었고 모형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난 칼질조차 쉽지 않았던 때라 선배가 시키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루하루 불만이 쌓이고 기대와는 달리 재미도 없었다.
점점 모형이 더 만들어지고 설계 과정이 드러났다. 단순한 스터디 모형이지만 선배에게서 공간의 쓸모와 공간에 따라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들을 때, 건축가는 공간을 다루는 사람이구나 하고 처음으로 느꼈었다. 여러 개의 스터디 모형을 보며 어떤 공간을 표현하고 싶었는지 궁금했고 매일 질문을 쏟아내었다. 그렇게 나는 선배들의 설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설계실 사람들 대부분이 집에 가고 비어 있었던 날이었다. 나와 동기는 도우미 하느라 조용히 칼질을 하고 있었다. 시원한 여름날의 밤바람이 설계실로 불어왔다. 잔잔한 음악이 깔린 이곳에서 선배 둘과 나와 동기, 넷이서 떠드며 모형을 만들다가 잠시 놓고 선배 둘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와 동기는 분위기를 타듯이 몸을 흔들흔들 거리고 박수도 쳤다. 아직도 나 이 날의 기억이 선명하고 놓고 싶지 않은 소중한 추억이다. 어디서 이렇게 개성 강한 선배, 동기와 함께 여름날의 기억의 한 조각을 만들 수 있을까.
아이가 잠든 깜깜한 밤, 잠들기도 아쉬운 시원한 여름날에 거실에서 뒹굴 거리며 두툼한 책 한 권 읽기 시작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건축학과를 갓 졸업한 사카니시 도오루는 대형 건축사무실로 취직하지 않고 존경하는 ‘무라이’ 선생의 건축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로 한다. 무라이 슌스케, 설계 사무실을 더 크게 늘려 대형설계사무소로 할 수 있음에도, 적은 인원으로 ‘내키지 않는 일은 정중히 거절하며’ 그에게 맞는 일을 한다. 무라이 선생과 사무실 직원들은 여름이 되면 여름별장으로 가서 그 곳에서 숙식을 하며 설계에 몰두하는 날을 보내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7월이 되자 여름별장이 있는 ‘가루이자와’에 가기 위해 사무실 짐을 싸서 간다. 그 곳에서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을 위해 설계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모든 유리창이 열리고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여름 별장이 천천히 호흡을 되찾아 간다. (p.27)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여름이 되고 별장으로 짐을 옮긴 사무실 사람들, 몇 개월 동안 비어있던 별장이 활력을 찾으며 제 기능을 하려 눈뜨고 있다. 책 속의 ‘나’인 사카니시는 무라이 선생을 관찰하고 사무실 식구들이 함께 설계한 건축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며 자신이 반했던 공간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놀라기도 한다. 난 ‘나’의 시선을 따라 건축 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읽어 나갔다.
경합에 응모할 도서관 설계가 끝이 보이고, 책장과 의자와 같은 가구, 그 곳을 쓰는 사람까지, 도서관의 모형이 거의 완성이 되어 갈 때쯤 무라이 선생은 쓰러진다. 결국은 경합에서 떨어지고 완벽했던 설계가 끝내 ‘모형’으로만 남게 되었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무라이 선생, 그가 쓰러지기 전에 써두었던 편지에 따라 사무실은 해산하게 되었다. 여름별장도 직원들의 설계 일에 몰두하기 위한 곳이 아닌, 무라이 선생의 친척이 가끔씩 쓰게 되는 별장으로 남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여름별장을 인수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크릴 케이스에 있는 현대도서관 모형과 마주하게 되었다. 여름 별장이나 도서관 모형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이 여름 별장은 다시 한 번 자네가 새롭게 만들면 돼. 탁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에 숨결을 불어 넣으면 되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때의 음성 그대로 내 귀에 되살아난다. (p.416)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여름별장에서 그들의 현대도서관 설계를 향한 열정은 순수했다. 어떠한 이익을 바라고 설계를 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그 곳을 쓰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생각했다. 연필 깎는 소리를 시작으로 하루의 문을 활짝 열고, 밥을 먹으면서, 잠깐 쉬면서도 그들의 설계 이야기는 끊이질 않는다. 읽을수록 학교 설계실의 날들이 기억난다. 어쩌면 학생 때는 취업문을 열기 전이었고, 현실의 찌든 모습을 접하기 전이었다. 상상으로 그려보던 공간은 학교에서 모형으로 만들어보고 손으로 그려볼 뿐이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회사에서 접한 건축은 현실 그 자체였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조건을 잘 녹여야 하고,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법 규제와 같은 많은 조건이 붙었고 당연히 ‘마감’이있었다. 공장 돌리듯이 많은 설계 일을 하나씩 쳐 내며 일하다보니 늘 마감에 쫒기며 일하게 되었다. 회사의 막내는 학교에서의 막내인 1,2학년과는 완전히 달랐다. 바쁘게 각자의 일을 해내기에 바쁘다보니 회사 선배들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기에도 무안할 정도였다. 적막한 사무실에서 마우스와 키보드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를 종종 날 숨 막히게 했다. 매일 야근과 철야를 반복하고 주말출근까지 서슴없이 하며 건축 일을 이렇게 계속 해야 하는 것인지, 꾸역꾸역 견뎌가며 일에 집중을 하는 것이 잘 하고 있는 건지 반문하게 되었다.
현실 속에서의 건축은 참 녹록치 않다. 학교 다닐 때 만들었던 모형과 스케치는 모두 고향집의 베란다 창고에 넣어 두었다. 실현되지 못한 모형일 뿐이지만 한 때 내 꿈의 공간이었다. 학교 다닐 때 꾸었던 꿈은 잠시 접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완전히 접어 어딘가로 집어 넣어버렸다. 나도 현실에 순응하며 현실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입덧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이제 내 본업을 하지 않은지 2년이 넘었다. 매일 아이와 씨름을 하며 3년차 경단녀로 살고 있으면서 얼른 내 일을 찾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현실속에 찌들어갈 내 모습이 상상이 되기에 두려움으로 앞날을 쉬이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다. 잠시 잊고 싶다가도 불현 듯 떠오르는 내 직업, 내 전공. 이 책을 읽으면서 학교 다닐 때의 그런 감성적인 설계를 다시금 소환하고 있다. 학과 건물 1층에 있는 자판기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친구들과 선배들의 개성이 담긴 그들의 공간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수다 떨던 날, 선배와 동기들과 이야기하며 만들어 나갔던 설계,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설계패널과 모형을 읽고 보면서 서로의 아이디어에 감탄 할 수 있었던 그때. 선배의 설계를 보면서 하나씩 배워가던 그때의 내 모습이 참 순수해보였다.
취업을 하고 야근과 철야에 찌들어 하루하루 그날의 일을 쳐 내기 바쁘던 날이 반복되어 나를 덮쳐 넘어뜨려도, 이제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17개월 아기를 키우고 있는 아이엄마여도, 나는 호기심에 눈을 반짝거리던 꿈 많던 건축학도였다. 내가 속한 현실 회사에선 불가능 했다. 잊혀져가고 있던 나의 기억을 떠올려서, 두근거렸다. 나도 내 설계를 했었고 그 곳에서 어떤 행위가 일어날지 상상하며 두근거렸다. 순수했던 날들이었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은 내 건축학도 시절, 잊혀 가던 날에 여름날의 바람이 상기시켜주고 책이 꼭꼭 집어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