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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Nov 15. 2024

처음, 낯선 세계

"너로 인해 낯선 나를 발견했거든."

"우리의 첫 만남이 기억나?"

"당연하지. 어떻게 잊어, 그날을."


그날도 우리는 늘 그렇듯 같은 자리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풍경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그가 나의 앞에 앉아 있었다. 저물어가는 저녁 햇살이 그의 이마에 살짝 기울어 빛을 얹었고, 속눈썹 아래로 미세하게 떨리는 그림자가 섬세하게 드리워졌다. 깊고 잔잔한 눈매와 부드럽게 이어지는 콧날, 단단하게 이어진 턱선, 그리고 젓가락을 쥔 손끝까지. 매일 보아온 얼굴인데도 그날은 유난히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알던 사람 맞나 싶을 만큼, 그의 모든 모습이 낯설게 다가왔다.


멀리서 이 장면을 바라보는 것 같은 이상한 거리감이 들었다. 너무 익숙한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의 존재조차 모른채 삶을 살아왔다. 각자의 궤도에서 나름대로 익숙한 세상을 살던 우리가, 지금은 같은 시간 속에 머물러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식사를 나누고 있다니. 순간적으로 찾아온 이 낯선 감각이 한참 동안 나를 그 자리에 붙들어 두었다. 마치 그와 내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사랑에 빠졌다는 게 이런 걸까? 이 묘한 설렘과 당혹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그 낯섦에 취한 듯,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터졌다. 익숙하다고 여겨졌던 그의 모습이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게 신기했다. 고개를 들어 다시 그를 보았을 때, 커다란 손으로 밥을 한가득 떠 입에 넣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남자가 귀여워 보이면 답도 없다던데....' 하고 혼자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덩치 큰 그가 말없이 밥을 먹고 있는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는 나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젓가락질을 멈추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런 그에게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왜 좋았어? 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대답이 궁금했다기보다는, 이 순간이 진짜라는 걸 확인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어쩌면 또 다른 의미에서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몰라 긴장되면서도, 그의 대답이 나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리고는 괜히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근데, '그냥'은 안 돼."


그는 살짝 웃더니 지긋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낯설어서."


낯설어서? 내가? 그 말을 처음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안에는 어떤 감정들이 담겨 있는걸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낯선 나를 발견했거든."


찰나의 고요. 그의 말이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듯 했다. 그가 나를 통해 발견한 자신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전에는 입어본 적 없던 셔츠를 꺼내 입고, 한 번도 뿌리지 않았던 향수를 뿌리며 거울 속 자신에게 매일 아침 물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기분 좋게 설렜지만,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불안해졌다고 했다. 그의 모든 일상이 소란스러워진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래서 모든 게 낯설더라고."


그의 고백은 따뜻하면서도 아릿하게 다가왔다. 나 때문에 그의 일상이 흔들렸다는 사실, 그 낯섦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가슴을 찌르면서도 뭉클했다. 마치 내가 그를 새로운 세계로 초대한 것만 같았다. 그의 말에 저 깊은 곳에서 잔잔한 떨림이 일었다. '이 사람 정말...'


그렇다. 너는 나에게, 낯설었다.
그랬다. 나 역시 너에게 낯설었다.
우리의 이 세계는 참으로 낯설다.

나는 그를 이 낯선 세계로
초대하고 있었다.


그제야 그가 흘리듯 "낯설어..."라고 중얼거리던 혼잣말이 떠올랐다. 그 말 속에는 그가 나에게 보여준 서툴고도 진솔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숨이 막힐 듯한 두근거림을 애써 누르며 늘 나에게 먼저 내밀었던 손. 낯선 떨림에 온 몸을 맡겼던 그였다. 그의 감정들은 겹겹이 쌓여이고 싸여 나에게로 왔다.


매일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너, 그리고 나. 우리는 서로를 통해 무수히 떨리는 감정의 결을 마주하고 있었다. 낯선 자신을 마주하는게 두려우면서도 묘하게 좋았다던 그. 자신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다정함과 애틋함을 표현하던 그.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온기가, 그 사랑이, 나에게 닿았다. 한없이 유치해지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면서도 그 감정에 기꺼이 몸을 내던지는 것, 그것이 그의 사랑이었다.


사랑이란 어쩌면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일지도. 내가 익숙하다고 믿었던 내 모습이 그의 눈을 통해 새롭게 비춰질 때, 우리는 함께 낯선 세계로 발을 내디뎠음을 깨닫는다.


그의 고백이, 왜인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하루다.

이제야 그의 질투를, 그의 투정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다.

스스로 조차 낯설었을 그 감정을 온전히 표현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알기에.



“낯설어…”

그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의 낯섦이, 기분 좋게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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