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열 Mar 27. 2018

맥주가 너무 맛있어서 법에 구멍이 뚫렸다

3월의 맥주 헤페바이젠: 맥주순수령을 무력화시킨 밀맥주

새로운 생명이 새록새록 자라나기 시작하는 3월입니다.


이 달의 맥주 소개가 점점 월초에서 월말로 미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다 저의 게으름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번 달은 월말로 미루어진 것이 다행으로 느껴집니다. 이번 달에 소개드릴 맥주는 너무 추운 날씨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맥주이기 때문입니다. (미세먼지와 어울리는 뿌연 맥주라는 소개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요.)


날씨를 이유로 3월의 맥주로 내정해 놓았지만, 어째 시기가 기가 막힌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이 맥주는, 너무 맛있는 나머지 당시 봉건 사회의 우두머리 계층이었던 공작이 법을 피해 특별히 허가한 맥주였거든요.


3월의 맥주는, 생명을 가득 머금은 맥주, 이른 봄날의 서늘함과 따스함을 모두 담은 맥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맥주, 그리고 맥주순수령을 어기게 만든 맥주, 바로 헤페바이젠Hefeweizen입니다.



효모와 밀이 들어간 맥주


헤페바이젠이라는 생소한 이름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모르시겠다면, '밀맥주'라는 쉬운 표현으로 근사할 수 있겠습니다. 맥주는 본래 보리로 만들어 '맥'주지만, 먼 옛날 독일에서는 보리와 함께 밀을 넣어 맥주를 양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맥주가 아니지 않냐고요? 100% 밀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밀과 보리를 섞어 쓰기 때문에 맥주라고 부른다고 코가 길어질 염려는 없겠습니다.


맥주를 마실 때 라벨에 표시된 원재료명을 주의 깊게 보신 적이 있나요?


"정제수, 보리맥아, 홉, 효모"


사실 여기엔 놀라운 사실이 담겨있습니다. 맥주 주변에 진열된 수많은 종류의 음료 중에서, 이보다 원재료가 적은 음료는 물 밖에 없을 겁니다. 물과 옥수수수염만 있으면 될 것 같아도, 탄산수소나트륨, 글리신, 합성착향료, 식물혼합추출물 따위가 다 들어가야 만들어지는게 옥수수수염차입니다. 그에 비해 자연에서 나는 곡물로만 만들었다니, 이 얼마나 고급진 음료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밀맥주는 여기에 하나의 원재료를 추가하면 됩니다. 바로 밀맥아입니다. 이 밀맥주는 대개 독일 맥주이기 때문에 독일어 성분표시가 있을텐데요. 밀맥아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Weizenmalz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이젠Weizen은 독일어로 밀입니다. (참 대단한 나라입니다. 밀맥주를 '밀'이라 부르고 흑맥주를 '검정'이라 부르니 말입니다. 맥주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면 그럴까요.)


그렇다면 바이젠 앞에 붙은 헤페Hefe는 무엇일까요? 소제목에서 이미 스포일을 당하셨겠지만, 효모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효모가 안 들어가는 맥주가 어디있겠냐만은, 이 헤페바이젠에는 양조에 사용된 효모가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뿌옇게 들어가 있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보통 맥주가 동동주라면 헤페바이젠은 막걸리라고나 할까요, 효모가 가득 들어가 색깔과 맛이 탁한 밀맥주가 바로 효모밀맥주, 독일어로 헤페바이젠Hefeweizen입니다.



기울여 보관한 헤페바이젠 병 아래에 효모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밀을 넣으면 보통 맥주보다 색이 밝아지기 때문에, 하얗다는 뜻의 독일어 바이스weiss를 사용해 밀맥주를 바이쎄Weisse, 혹은 바이스비어Weissbier 라고도 부릅니다. 밀을 뜻하는 바이젠과 발음이 비슷해 자연스럽게 두 이름이 혼용되는데, 사실 전혀 다른 뜻의 두 단어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 괜히 뿌듯할지도 모릅니다.



밀이 들어가 보통의 맥주와는 상당히 구분되는 맛을 내면서도, 대중들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부담스럽지 않은 맛 때문에 '흔한 맥주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크래프트 맥주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입니다. 영세한 국내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파는 작은 가게에 가면 필스너, 바이젠, IPA, 스타우트 정도가 있는 것이 흔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크래프트 맥주를 접해보신 분들에게는 바이젠이라는 이름이 꽤 친숙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 바이젠이라는 이름은 굉장한 오역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독일어의 'z'는 영어의 'z'보다 강한 발음인데도 불구하고 영어의 'z'를 번역하듯이 지읒을 썼기 때문인데요. 모차르트Mozart를 모자르트, 나치Nazis를 나지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면 바이젠보다 바이첸이라고 부르는게 더욱 적절해 보이지만, 이미 바이젠으로 굳어져 버린 모양입니다.



맥주순수령, 그 위에 피어난 혼종 맥주

 

밀맥주의 역사는 매우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가장 먼저 문명이 발달한 곳이자 가장 먼저 곡물로 술을 만들기 시작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은 보리보다 밀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따뜻한 기후였기 때문입니다. 곡물을 발효시키는 문화가 보리를 많이 재배하는 유럽 북쪽까지 전해져 맥주가 되었지만, 밀을 재배하기에 충분히 따뜻했던 뮌헨 지방에서는 여전히 보리와 밀이 모두 술의 재료가 될 수 있었습니다.


500년 하고도 2년 더 전인 1516년, 지금의 독일 남부를 이루는 바이에른 지방에 맥주순수령이 선포됩니다 . 간단히 말해, 모든 맥주는 물, 보리, 홉 외에 어떤 재료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법입니다. 많은 분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시급한 법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대기업의 상업적인 맥주에는 옥수수, 전분 등이 들어가 원가를 절감해주기 때문이죠. (물론 옥수수를 넣은 맥주도 하나의 장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맥주순수령은 독일 남쪽 바이에른 지방에서는 아직까지도 신성시되며 지켜지는 법입니다.

요즘에는 순수령에 따라 보리만 사용했다고 꼭 질 좋은 맥주가 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다른 재료를 사용해 더욱 창의적이고 가치있는 맥주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맥주순수령은 맥주의 다양화, 나아가 맥주의 발전을 막는 고리타분한 법이라는 주장도 강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일이 좋은 맥주를 만드는 나라의 이미지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한편으로는 고집스럽게 전통에 매달리는 독일의 방식도 또 다른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맥주들은 맥주순수령의 기준에 부합하는 맥주라는 뜻으로 "바이에른 맥주순수령에 따라 양조됨Gebraut Nach dem Bayerischen Reinheitsgebot" 등의 문구를 라벨에 자랑스럽게 넣기도 합니다.



다음 중 맥주순수령에 따라 양조되었다고 명시되지 않은 맥주를 고르시오. (사진 출처 : 글 하단 참조)



맥주순수령의 취지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Clow 2008)


첫째로, 지금은 홉이 맥주의 필수 원료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야생 허브를 모아 만든 그루잇gruit을 홉 대신 쓰는 일이 잦았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맥주의 품질이 들쑥날쑥할 뿐만 아니라, 위생적으로도 아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즉, 맥주순수령은 독이 있는 풀을 맥주에 잘못 넣는 일을 막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둘째로, 이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외국의 맥주를 수입하지 못하게 해 자국의 맥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셋째로, 식량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밀을 맥주에 사용하지 못하게 해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취지만 놓고 보면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솔로몬의 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높으신 분들이, 좋은 취지로 맥주순수령을 제정하고 나니 밀맥주가 너무 먹고 싶은 겁니다. 이에 참지 못한 비텔스바흐Wittelsbach 공작은 자신이 좋아하는 밀맥주를 만드는 데겐베르크Degenberg 가문에게 밀맥주를 양조할 수 있는 특별 허가를 내어주고는, 선심 쓰는 척 마음껏 밀맥주를 마십니다.


비텔스바흐 공작은
맥주순수령이 금지한 밀맥주가 먹고 싶어
밀맥주 양조 특별 허가를 내 줍니다


백 년이 흐르고, 데겐베르크 가문이 대를 잇지 못해 봉건제도에 의해 이 양조장은 밀맥주를 좋아하는 영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영주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서, 이제는 아예 밀맥주를 생산하는 본인 소유의 양조장을 몇 개 만들고는, 그 맥주를 여러 민간 맥주집에서 의무적으로 팔게 만듭니다. 영주는 돈을 많이 벌어서 좋았고, 불쌍한 시민들은 이렇게라도 밀맥주를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흐르고 10월의 맥주, 뮌헨 라거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관련글 : 뮌헨 맥주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은 방법) 사람들의 입맛은 시원하고 달달한 라거 맥주로 옮겨갔습니다. (관련글 : 흔한 맥주라고 다 싸구려는 아니다) 위기감을 느낀 영주는 수도원을 비롯한 사설 양조장에서도 얼마든지 밀맥주를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으나, 이미 때를 놓친 밀맥주 산업은 멸종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밀맥주의 가치를 눈여겨본 투자의 귀재가 나타납니다.


게오르그 슈나이더Georg Schneider라는 사람은 필스너와 밝은 계통의 라거가 대유행하던 1855년, 망해가는 밀맥주 사업을 헐값에 인수해 맛있는 밀맥주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거듭합니다. (Klemp 2001) 밀맥주의 인기는 쉽게 되살아나지 않았지만, 슈나이더 덕분에 밀맥주는 필스너의 대유행 속에서도 약하게나마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슈나이더의 자손은 아직도 밀맥주를 만듭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독일에서 밀맥주의 가치를 알아본 연합국은 슈나이더가 다시 밀맥주를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왔고, 사람들의 입맛도 다시 돌아오면서 밀맥주의 수요가 점차 늘어났습니다. 한 때 멸종 위기에 처했던 독일식 밀맥주는 이렇게 부활을 시작했고, 지금은 독일 맥주 시장의 20%(Klemp 2001)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맥주 스타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거, 바나나 맛인가요?


헤페바이젠을 비롯한 독일식 밀맥주에는 마셔본 사람만 아는,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특유의 맛과 향이 있습니다. 맥주의 맛을 논하는 포럼같은 곳에 들어가서 독일식 밀맥주에 대한 평을 읽어보면, clove, banana, ester, fruity, floric 등의 몇 가지 키워드를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정향clove과 바나나가 이 특유의 맛을 형용하는 데에 가장 널리 쓰이는 단어입니다.


정향clove은 향신료의 일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향신료는 아니어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정향에서 추출한 성분을 치과에서 진통제로 쓰기 때문에 정향은 한국인이 가장 혐오하는 향신료 중 하나라는 말도 있는데, 바이젠에서 치과 냄새가 난다며 싫어하는 분을 본 적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바이젠은 먼 옛날부터 만들어온 맥주답게 에일 효모를 사용합니다. (관련글 :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하지만 에일 효모라고 다 같은 효모가 아니라서, 바이젠을 만드는 효모는 일반적으로 에일 맥주에 흔히 쓰이는 에일 효모와는 또 다른 종입니다. 뮌헨 지방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야생 효모인 것이지요. 이 효모는 보통의 에일 효모에 비해서도 페놀, 에스테르 등의 화학 물질을 많이 만드는 편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이소아밀 아세테이트isoamyl acetate라는 물질이 많아(wikipedia: wheat beer) 정향의 향, 바나나 혹은 바닐라와 비슷한 약간 느끼하고 눅진한 향, 봄철에 피어나는 꽃향기 등 온갖 향을 냅니다.


이 향들이 모두 어우러져 만드는 밀맥주 특유의 맛은 양조하는 회사마다 또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뮌헨 근처에서 훌륭한 밀맥주를 만드는 수많은 양조장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른 효모를 가지고 이를 끊임없이 배양해 맥주를 만들기 때문에, 여러 양조장의 밀맥주를 음미하며 비교해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잘 느껴보면 분명히 차이를 감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밀이 보리보다는 부드럽고 달며 풍성한 맛을 내는 것을 바탕으로, 약간의 바닐라 향기가 나는 듯한 바나나 향이 가득하고, 약간의 향신료 맛이 난다고 느낄 만큼의 얼얼한 향이 아주 살짝 납니다. 또, 바이젠은 탄산이 상당히 강한 맥주입니다. 보통의 에일 맥주보다 적정 온도도 약간 낮습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미지근하고 김빠진 바이젠은 굉장히 느끼해 매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때문에 보통의 맥주가 맥아의 단 맛과 홉의 쓴 맛의 균형을 기초로 한다면, 바이젠은 바나나와 밀의 부드러운 향과 향신료와 탄산의 톡 쏘는 맛의 균형에 그 맛이 달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바이젠에는 홉이 거의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맥주 특유의 쌉쌀한 뒷맛 대신 부드럽고 향기로운 맛이 매우 강조되는 맥주입니다. 평소에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분들이 이러한 점 때문에 바이젠을 찾으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편의점에서 맛있다는 맥주를 다 찾아 먹어봐도 다 똑같은 맛이었는데, 바이젠을 먹어보고는 '이런 맛도 있구나' 하며 크래프트 맥주에 눈을 뜨는 일도 많습니다.



헤페바이젠 한 잔의 예술


시각적인 효과가 맛 못지 않게 중요한 세상입니다. 헤페바이젠은 이러한 시대에 요구에 걸맞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거품이 많습니다. 앞서 바이젠은 탄산이 많은 맥주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이에 더해 밀은 보리보다 단백질 함량이 높은 곡물입니다. 단백질은 맥주 거품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산화탄소 방울이 떠오르는 길에 단백질 섬유와 엉겨 표면에 닿아도 터지지 않는 것이 바로 맥주 거품이기 때문입니다. 탄산, 즉 이산화탄소도 많고 단백질도 많으니 헤페바이젠에 거품이 많이 생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또, 단백질이 더욱 두텁게 엉기게 되니 거품의 수명도 길어집니다.


밀은 보리보다 단백질이 많습니다. (Ewart 1967) (좌) https://skipthepie.org (우)



기네스의 거품이 알갱이가 작아서 오래 유지될 수 있었던 반면, 헤페바이젠의 거품은 알갱이는 크지만 껍질이 두꺼워 오래 남습니다. 기네스의 거품은 알갱이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아 거품이라기보다도 크림과 같은 차분한 질감을 가지는데 반해, 헤페바이젠의 거품은 마치 샴푸 거품, 목욕 거품처럼 풍성합니다. 덕분에 기네스의 거품은 표면이 평평하지만, 방금 따른 헤페바이젠은 잔의 끄트머리 위로 거품이 산처럼 수북이 쌓여있기도 합니다.


둘째로, 매우 뿌옇습니다. 마치 요즘 하늘처럼요. 이 뿌연 것은 전적으로 효모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맥주는 생산 후 여과 및 살균 과정을 거쳐 유통되는데, 헤페바이젠만큼은 발효에 사용된 효모를 거르지 않고 유통합니다.


효모는 생김새 뿐만 아니라 맛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것처럼 탁한 맛을 내는데, 이것이 밀맥주 특유의 눅진한 바나나 향과 합쳐져 이 향을 더욱 꽉 차고 텁텁하게 만듭니다. 맹물에 끓인 국물과 육수에 끓인 국물의 차이라고 하면 와닿을까요? 이 차이는 헤페바이젠과 크리스탈바이젠Krystallweizen을 비교해 보시면 정확하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크리스탈바이젠은 헤페바이젠에서 효모를 거른 맥주거든요.


이 두 가지 특징 때문에, 헤페바이젠은 종종 독특한 모양의 전용잔을 사용합니다. 본래 모든 맥주에는 그 맥주의 맛과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맞춤형 잔이 있습니다. 일부 매니아들은 맥주에 맞는 잔에 따라 마시는 것을 아주 중요한 의식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아무 잔에나 따라 마셔도 맥주의 맛을 느끼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하지만 헤페바이젠은 전용잔의 중요성이 가장 강조되는 맥주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 전용잔은 너무 예쁘게 생긴 나머지, 비슷한 모양의 잔을 지난 몇 년간 한창 유행했던 '스몰비어' 맥주집들에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여러분께 많이 친숙하실 겁니다.



거품이 수북한 헤페바이젠과 전용잔


이 잔은 전체적인 모양은 약간 길쭉한 편이면서, 아래쪽은 가늘었다가 위로 갈수록 굵어지고, 가장 위에는 다시 약간 오므려져 곡선미가 강조된 모양입니다. 이 잔은 위의 두 가지 특징을 동시에 사로잡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먼저, 탁한 헤페바이젠을 이 잔에 따르면, 굵기에 따라 반대쪽의 빛이 비치는 정도가 달라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 효과가 나타나는데, 반대쪽에 적절한 조명을 배치하면 참 예쁩니다.


또한, 헤페바이젠의 전용잔은 본래 용량보다 꽤 큰 편입니다. 헤페바이젠 500ml를 따르게 되어 있는 전용잔을 보면, 위에서 꽤나 내려온 지점에 0,5l 라고 표시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소수점으로 온점 대신 반점을 사용합니다!) 얼추 그 위로 100ml도 넘게 들어갈 정도로 용량이 남는데요, 이게 다 거품을 위한 자리입니다. 이 잔이 가득 차게끔 거품을 잘 내서 따르면, 잔의 굵기가 다시 오므려지는 구간에 하얀 거품이 쌓여 유난히 밝은 색의 헤페바이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듭니다.


특별한 전용잔이 있는 만큼이나, 헤페바이젠은 따르는 방법 또한 특별합니다. 맥주를 좋아하는 (그리고 겉멋이 조금 든) 친구로부터 보신 적이 있을 가능성이 큰데요, 병 혹은 캔 안에 가라앉아 있을 효모를 남김없이 따르는 방법입니다.


먼저 잔을 기울여 거품이 많이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천히 따라 줍니다. 워낙 잔이 길쭉해 기울이지 않는다면 거품이 홍수가 나기 십상이지만, 기울이기만 한다면 살얼음판 걷듯 조심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3분의 2 정도를 따르고 나면, (중간에 119.53초를 기다려야 했던 기네스와 달리, 여기서 3분의 2라는 수치를 정확히 지킬 필요는 별로 없습니다) 따르는 것을 멈추고 병을 젓듯이 흔들어 줍니다. 가라앉아 있는 효모를 깨워서 잔에 들어갈 수 있게 섞어주기 위함입니다. 그 후, 바로 세운 잔에 나머지 맥주를 따릅니다.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휘핑크림 같은 거품으로 잔 위를 수북이 채우면 성공입니다. 병을 흔들고 나서 맥주를 따르는 동안 잔 안을 관찰해 보시면 효모가 들어가 맥주가 탁해지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헤페바이젠은 은은한 조명을 만듭니다





헤페바이젠을 만드는 여러 이름난 양조장의 이야기,

그리고 독일 밖에서 만든 밀맥주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한 달에 한 종류씩, '이 달의 모범맥주'와 함께 진하고 시원한 맥주 이야기를 배달합니다.

이 시리즈는 대한민국 공군 교양카페 <휴머니스트>에 <이 달의 모범맥주>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전글 바로가기
여는 글 : 수제맥주? 맥주는 원래 수제였다.
10월, 옥토버페스트맥주 메르첸 : 옥토버페스트가 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10월, 뮌헨 둥켈과 헬레스 : 뮌헨 맥주가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은 방법

모두가 겉으로만 아는 라거와 에일의 차이

영국, 에일, 그리고 IPA의 역사

이 독한 맥주도 누군가에게는 생명이었다

흔한 맥주라고 다 싸구려는 아니다

커피 대신 맥주로 스타벅스를 차려볼까

기네스의 질소충전포장: 맥주 거품의 과학


참고문헌
J.A.D. Ewart (1967) "Amino acid analyses of cereal flour proteins." Journal of the Science of Food and Agriculture 18, 548-552
F. Klemp (2001) "Bavarian Wheat Beers" All About Beer Magazine, Vol.22 Issue 3
https://skipthepie.org "The Nutrition Search Engine"
G. Clow (2008) "A Brief History of Hefeweizen" http://www.beerboozebites.com/2008/12/13/a-brief-history-of-hefeweizen/
사진 출처
http://www.eichfeld.de
http://www.1000getraenke.de
http://koreajoongangdaily.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aid=3033789
http://www.cyprusbeermaniacs.com/what-does-hefeweizen-mean
커버 사진을 제공해 주신 바이헨슈테판 페이스북 페이지 @Weihenstephan에 감사를 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네스의 질소충전포장: 맥주 거품의 과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