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by 양양


내 친구 윤희.

윤희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사랑에 가장 잘 빠지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는 중국어 선생님을 좋아하고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과대 오빠

운동을 끊고는 체육관 코치님을.

물론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은 없다.


한동안 잠잠하던 윤희가

어느 날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이번엔 또 누군데”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윤희는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경기도에 있는 우리 집을 서울로 이어주는 버스가 있는 거 알지? 나 맨날 1-9번 버스를 타고 학교 가고, 너 만나러 가고 그러는 거잖아.

4년 동안 멍한 얼굴로 그 버스 타고 다녔거든.

근데 며칠 전에 평소처럼 카드 태그하면서 ‘안녕하세요 ‘ 인사를 건네는데 참 잘생긴 외모의 기사님이 앉아계셨어. 평소엔 도봉산역까지 가는 그 3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는데, 그날은 너무나도 짧게 느껴지더라. 나이는 몇 살일까? 어쩌다 버스 기사를 하게 되신 걸까? 어떤 사람일까!

수많은 궁금증이 담긴 눈으로 백미러에 미치는 기사님을 유심히 살펴보고, 버스에서 내리는 게 아쉬워 지갑을 잃어버린 척 사람들이 다 하차한 뒤에야 밍기적거리며 내렸지 뭐야.

그다음부터는 매일 아침 1-9번 버스를 탈 때마다 혹시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서게 되었어. 거의 대부분은 만날 수 없었지만, 간혹 운이 좋은 날은 일주일에 2번은 그 버스를 탈 수 있었어.

아무래도 나는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분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나 봐. 하루에 기대되는 순간을 주셨으니까. “


나는 속으로 잠시 비웃다가, 한심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이젠 하다 하다 버스 기사를 좋아하다니.

그렇게 두 달 정도가 지나고

내가 슬슬 윤희의 이야기를 잊어갈 때 즈음,

윤희는 다시 말을 꺼냈다.


나 최근에.. 정말 힘들었던 거 알지? 정말 힘들었어 정말로. 근데 거짓말처럼 그런 시기가 찾아오자마자 한동안 그분을 볼 수가 없었어. 보통 목요일 11시쯤 버스를 타면 꼭 볼 수 있었는데.. 그만두신 걸까? 이젠 다른 버스를 운전하시는 걸까? 뭐, 사실 속상한 마음도 잠시고 곧 다시 원래대로 지친 얼굴로 버스 밖 창문을 내다봤어.

그러다 몇 달 만에, 이젠 아무런 기대 없이 1-9번 버스를 탔는데 말이야. 그 기사님을 다시 만났어. 나 정말 버스에 올라서는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니까? 갑자기 그날 하루가 특별해지고 행복해졌어.

정류장에서 버스가 출발하기 전, 자리에 앉아 습관처럼 룸미러에 비친 그분을 보는데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그분도 나를 본 거야.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혹시.. 날 기억하고 계셨던 걸까?”


"그만해."

나는 참다 참다 윤희의 말을 끊고 말았다.

원래 그런 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허무맹랑한 소리를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어 결국 못된 말들을 내뱉었다.

"진짜 기대하는 건 아니지? 넌 누굴 좋아하는 게 취미니? 말도 안 되는 거 너도 알잖아. 시간 낭비야."


윤희는 재잘거리던 입을 한참 멈추어두었다.

그러다 양쪽 머리를 귀 뒤로 한 번 쓸어 넘기더니,

“맞아. 그렇지만... 난 누굴 사랑하지 않으면 이 불행한 삶을 견딜 수가 없어. 이대로 살다 간 말라죽을 것만 같아서, 늘 내 사랑을 나눠줄 사람을 찾는 거야. “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늘 재고 따지며 마음을 주지 않을 이유를 찾는 나로서는, 생채기 난 마음들을 다시 사랑으로 버텨나가는 윤희를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친구 윤희.

윤희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사랑에 가장 잘 빠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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