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ecdote
국제법은 질서를 약속하지만, 현실은 혼돈 속에서 작동한다. 협력의 언어를 말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국가들이 권력과 생존, 자국 이익을 위한 게임을 벌인다. 나는 이 사실을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나는 유엔 협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몸소 경험했다.
겉으론 세련된 연설과 단단한 악수가 오가는 우아한 무대 같아 보이지만, 그 이면엔 끝없는 줄다리기와 눈치 싸움이 가득했다.
외교란 스포츠이며, 예산은 무기이고, 합의란 결국 모두를 똑같이 불행하게 만드는 기술일 뿐이었다. 마치 상대방이 승리인지 패배인지 헷갈릴 정도로 교묘한 타협의 스포츠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순간은 내가 유엔 주재 칠레 대표부의 정책보좌관으로 일하며 특별정치임무단(SPMs, Special Political Missions)의 예산을 둘러싼 협상에 참여했을 때였고, 그 회의는 내 인내심과 창의력을 끝까지 시험한 사건이었다.
특별정치임무단(Special Political Missions, SPMs)은 안보리가 승인한 임무로서, 국제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는 정치적 노력을 지원하며, 이 임무들은 주로 정치적 중재, 갈등 예방 및 평화 구축 활동을 수행한다.
잠시 유엔의 회의실을 떠올려보자! 형광등은 강렬하게 빛나고, 다양한 언어가 섞인 속삭임과 서류 넘기는 소리가 어지럽게 얽혀 있던 그 공간. 각 회원국 대표들은 보이지 않는 진영을 따라 흩어졌다.
한쪽에는 부유한 국가들(일명, 선진국들)의 정중한 표정 뒤에 단호한 결의가 엿보였고, 손에 든 스프레드시트는 그들의 방패와도 같았다. 반대편에는 개발도상국 연합 G77이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각양각색이지만, ’ 공정성‘이라는 한 단어로 단단히 뭉쳐 있었다.
그리고 나? 나는 커피잔을 손에 꼭 쥐고, 그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중재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
SPMs의 중요성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임무들은 취약한 국가들을 지탱하는 생명줄 같은 존재였다. 전쟁의 혼란과 통치 붕괴를 가까스로 막아주는 실타래와도 같았지만 일부 대표들에게 SPMs은 그저 예산안에 추가된 항목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효율성‘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제안서를 칼처럼 잘라냈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란 말은 종종 ‘더 적게 쓰자’는 뜻으로 들렸다.
그때였다.
유럽 선진국 중 한 대표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완벽한 윈저 매듭 넥타이만큼이나 정확했다.
"우리는 재정적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달러가 가치 있게 쓰여야 합니다."
그러자 태평양 섬나라 대표가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모든 달러는 정말 중요합니다. 평화유지군의 보호를 받으며 생존하는 가족들에게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협상은 단순히 예산 항목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국제법이 정말로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는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 뒤에 있는 인간적인 현실을 봐야 한다. 과연 우리가 예산을 쥔 이들에게 스프레드시트 너머에 있는 생명과 희망을 보게 만들 수 있을까? 회의론과 자기 이익이 가득한 회의실에서 공통의 기반을 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외교에서 드라마틱한 승리란 없다. 대단한 연설도, 열렬한 박수도 없었다. 그저 몇 문장의 문구 조정, 지친 고개 끄덕임, 그리고 마침내 묵묵히 합의문에 서명하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승리가 거대한 성취처럼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 순간, 우리는 회계 논리와 인도주의 사이의 다리를 놓았으니까.
그리고 그 다리는 비록 불완전했지만,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힘이었다. 국제법은 이상이 아닌, 현실이다. 그 협상은 혼란스러웠고, 완벽하지 않았으며, 때로는 냉소와 이기주의가 넘실거리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국제법은 여전히 세계를 잇는 다리였다.
그리고 나는 그 가장 치열한 전선에서, 그 다리를 지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백절불굴(百折不屈),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것이 국제법을 다루는 사람들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작은 승리는 엄청난 성취처럼 느껴졌고, 권력과 정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도, 국제법이 여전히 두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니까.
그 당시 그 협상은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반면 무엇보다 깊이 인간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02 <다양한 현실의 세계를 연결하다>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