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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동생 때리지 마!

Framework for Stability

by 유엔이방인 김상엽
세상에서 규칙이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 보자. 모두가 같은 보드게임을 하고 있지만, 한 플레이어는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고, “감옥에 가라”는 카드를 무시하며, 심지어는 필요할 때마다 게임 규칙을 바꿔 버린다. 남은 사람들은 화를 내지만, 이길 방법이 없다. 그 게임은 이미 깨져 있다. 국제법이 없는 세계 질서가 바로 그렇다.


국제법은 불완전하지만 필수적인 장치다. 규칙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예측 가능성이 생기고, 힘의 충돌이 보복의 악순환으로 번지는 속도를 늦춘다. 국제법이 없다면 외교 무대는 단순한 주먹다짐이 되고,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조차 모호한 혼란이 벌어진다.


이 질서의 중심에는 유엔 헌장이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잿더미 위에서 세계는 다시는 파국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헌장을 만들었다. 그중 제2조 제4항은 가장 단호한 문장으로 남아 있다.


“국가는 다른 국가를 침략해서는 안 된다.”


단 두 가지 예외만 허용된다. 자위권의 행사, 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SC)의 승인. 이 조항은 전면적 침략 전쟁을 사실상 금지하는 규칙이 되었고, 과거엔 당연하던 정복 전쟁을 역사 속으로 밀어냈다. 마치 어머니가 형제의 싸움을 단호히 끊으며 “동생 때리지 마!”라고 외치는 순간, 룰이 명확해지는 것과 같다.

제2조
국제연합과 그 회원국은 제1조에 명시된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다음의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1. 국제연합은 모든 회원국의 주권평등 원칙에 기초한다.
2. 모든 회원국은 회원국 지위에서 발생하는 권리와 이익을 그들 모두에게 보장하기 위하여 이 헌장에 따라 자국이 부담하는 의무를 신의에 좇아 성실하게 이행한다.
3. 모든 회원국은 자국의 국제 분쟁을 국제 평화와 안보 그리고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한다.
4. 모든 회원국은 자국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국가의 영역 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에 반하거나 국제연합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그 밖의 어떠한 방식의 무력 위협이나 행사도 삼간다.
5. 모든 회원국은 국제연합이 이 헌장에 따라 취하는 어떠한 조치에서도 국제연합에 모든 지원을 제공하며, 국제연합이 예방 또는 강제 조치를 취하는 대상인 어떠한 국가에도 지원을 삼간다.
6. 국제연합은, 국제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한, 국제연합 회원국이 아닌 국가가 이러한 원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보장한다.
7.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본질상 어떤 국가의 국내 관할권 안에 있는 사안에 간섭할 권한을 국제연합에 부여하지 않으며, 그러한 사안을 이 헌장에 따른 해결에 맡기도록 회원국에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원칙은 제7장에 따른 강제조치의 적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국제법은 단순히 전쟁을 막는 규범에 머물지 않는다. 무역, 인권, 환경, 공해(公海)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며, 하나의 거대한 그물망처럼 세계를 엮는다. 이 그물망은 언제나 헐거워 보이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면 무질서 속으로 완전히 추락하지 않도록 붙잡아준다.


예컨대 세계무역기구(WTO)의 분쟁 해결 절차는 관세 문제를 총부리 대신 서류로 풀게 한다. 제네바 협약은 전쟁 중에도 고문을 금지하고 민간인을 보호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물론 강대국은 규칙을 자기 이익에 맞게 해석하려 하고, 독재자는 허점을 파고든다. 그러나 규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위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고, 국제적 비난과 제재를 가할 근거가 생긴다.


완벽하지는 않다. 강대국이 규칙을 무시하거나,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빠져나가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국제법의 힘은 바로 그 “예측 가능성”에 있다. 협상장에서 서로 국적, 언어, 이해관계가 다른 대표들이 마주 앉을 때, 국제법은 최소한의 공통 언어를 제공한다.


내가 회의장에서 지켜본 장면이 있다. 유엔 평화유지 결의안을 다루던 자리에서 쉼표 하나를 어디에 둘 지를 두고 토론이 이어졌다. 겉보기에 사소해 보였지만, 그 속에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깔려 있었다.

“우리가 이 규칙을 무너뜨린다면, 상대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라는 개념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국제법을 지키는 것은 이상주의가 아니라 실용주의다. 갈등을 억제한다. 규칙은 전쟁의 문턱을 높이고, 대화를 우선하게 만든다. 공통된 기준으로 무역·인권·환경 등에서 최소한의 합의점을 제공한다. 예측 가능성을 통해 국가 간 신뢰와 협상의 기반이 된다.


국제법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손을 놓아도 될까? 오히려 허점을 메우고 더 나은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사필귀정(事必歸正),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적 선택이자, 우리가 여전히 법이라는 이름의 다리에 기대는 이유다.


Takeaways

국제법은 불완전하지만, 예측 가능성과 공통 언어를 제공해 혼란을 억제한다.

유엔 헌장 제2조 제4항은 침략 전쟁을 금지하는 국제 질서의 핵심 규칙이다.

허점은 존재하지만, 규칙 위의 협상은 무규칙 경쟁보다 언제나 낫다.


04 <생명을 구하다>를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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