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딱 1년만 부탁드려요.”
그렇게 어머님과의 동거는 시작됐다.
인생이 대부분 예측하지 못한 일들로 흘러가듯 이 또한 계획에 없던 일이었지만 맞벌이 회사원으로써 어머님의 도움은 그저 감사할 일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나 또한 내 새끼 내가 키워야 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부모님께 도움 받는 게 당연시된 요즘 세상에서도, 이미 우리를 키우느라 고생하셨고 이제야 본인들 인생 사시는데 나의 자식까지 키워달라 하는 건 염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럼 부모님께 도움 받는 자식들은 모두 다 염치가 없고, 부모 생각 따위 하지 않는 불효자식이라는건가?
지금 생각해 보면 가보지 않아 아무것도 몰랐기에, 선택지가 없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역시 사람은 경험한 만큼만 알 수 있다는 게 한 번 더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현실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나 또한 선택지가 생겼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차마 아직 걷지도, 말도 못 하고 겨우 앉아만 있는 아기를 혼자 어린이집에 새벽같이 데려다주고 늦게까지 남겨둘 수는 없었다. 남의 손에 맡기는 것 보단 가족이 이백번 나았다.
선택지가 없었다면 마음 아파도 어쩔 수 없이 돌봄이모님을 모셨거나 어린이집 연장 보육을 했겠지만 선택지가 생긴 이상 내 새끼가 우선이었다. 정확히 우리 마음이 편하고자 한 선택이긴 하지만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었다.
내리사랑이 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부모가 되어보니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마음보다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마음이 강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감사하단 말로 대신하며 어머님과 같이 살기로 했다.
“어머님, 내년이면 회사 사옥 지어지는 근처로 이사해서 직장 어린이집 보낼 거예요. 그러니 1년만 등하원만 부탁드려요.”
우리의 당초 계획이 그랬다. 회사와 집이 멀어 당장은 직장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지만 1년 뒤 예정대로 사옥이 지어지면 아주 좋은 시설의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 터였고, 아기도 새벽같이 어린이집에 갈 필요도 없으니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이 또한 7개월이 지난 지금은 틀어진 계획이지만.
우리 집은 24평의 소형 아파트이다.
방 세개, 화장실 하나. 방문을 닫아도 거실의 소리가 방으로, 방의 소리가 거실로 다 들려오는 아담한 옛날 아파트의 구조이다.
다행히 우리 부부 둘 모두 물욕이 없고 특히 나는 이미 미니멀리즘에 빠져있었기에 아직까지는 방 하나를 비우는 일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평일에 지내실 어머님 방을 마련했다. 옷장, 매트리스, TV 등 작은 방에 최소한의 필요한 가구를 넣어드리고 불편한 게 없으실지 마음이 쓰였다.
어머님과 지내는 내가 불편하다는 생각보다는 어머님이 불편하신게 없으실까 내내 마음 쓰여 불편했다. 어머님도 우리도 이 상황이 처음이라 구체적인 준비도 없었고 계획은 더더욱 없었다.
대략 아침에 한 시간 등원준비 후 등원, 오후에 하원해서 두 시간 정도 집에서 같이 놀아주시는 거니 크게 무리는 없으실 거라 생각했던 게 우리의 짧은 계산의 전부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옷은 뭘 입히고, 밥은 뭘 먹이고, 어머님의 아침식사는 어떻게 할 것이며, 아기가 어린이집 가 있는 동안 어머님의 여가시간은 뭘 하실 거며, 하원해서는 씻겨주실 건지 우리가 와서 씻길 건지, 간식은 뭘 먹일지, 저녁식사는 어떻게 드실 건지, 우리가 돌아오면 어머님은 방문 닫고 들어가셔야 퇴근이 될지 등등 딱히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그래서 사전에 고려했어야 할 일들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 모든 순간, 모든 결정이 고비로 다가왔다.
내가 무던한 스타일이라 자부했기에 아들과 부딪히면 부딪혔지 내가 어머님과 충돌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같이 산다는 걸 너무 쉽게 생각했었다.
각자 여태까지 살아온 라이프스타일이 있고, 그게 너무 다른 경우라면, 그리고 아기를 맡긴 입장에서 늘 너무나 명백하게 ‘을’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우리 부부는 어머님과 동거를 시작하고서야 하나씩 하나씩 마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