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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현기 Nov 11. 2024

[100-100글쓰기 4] 인생은 마라톤처럼

21.0975km, 2시간 22분 5를 쉬지 않고 달린 거리다. 지금 까지 한 번도 이런 긴 거리를 달려본 적 없다. 날씨 좋은 날 자전거를 타고 이 거리보다 더 멀리 간 적은 있어도 오직 두 발로는 처음이었다.  


골인 지점이 200m쯤 남았을 즈음, 나보다 먼저 도착한 크루(crew. 동호인) 들이 크게 외치는 파이팅 소리가 들렸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힘이 났다.

마지막 골인 지점에 들어서자, 물과 초콜릿을 들고 나에게 왔다.


"축하드립니다!"

"자, 인증사진 찍어야죠! 여기 보세요!"


초콜릿을 입에 물고 왼 손으로 완주 메달을 들었다. 땀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고 사진을 찍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마라톤 경기장, 선수와 축하해 주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경기장 한쪽엔 인증 사진을 남기는 포토존이 운영됐는데 길게 서 있는 사람들을 보자 엄두가 나질 않아 포기했다.

2024년 6월 평소 달리기는 생각하지 않다가 다이어트 때문에 시작했다. 바디프로필 촬영이 8월 중순이었는데 체지방은 아직 원하는 만큼 빠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었다. 매일 달리지는 못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이빨 빠진 듯 달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지난 일요일 목표했던 마라톤 하프 코스 완주에 성공했다. 끝까지 달린 덕분이다.


"운동 좋아하실 것 같은데, 저희 크루에 들어오실래요?"

"아, 제가 그 정도 실력이 못되는데요."

"다 못 뛰어요. 저도 여자라서 못 뛰지만 다른 남자분들 뒤꿈치 보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목표 지점에 도달해 있더라고요. 같이 달려요!"


우연히 스마트폰을 바꾸러 이전 에도 들른 대리점에 들렀더니 그 사이 바뀐 점장이 함께 해보자고 했다. 달리기는 자신 없었다. 초중고 시절에도 반 대항전에 어쩔 수 없이 주자로 나가게 되면 긴장감에 토를 한적 있을 정도다. 성인이 되어서도 5km 내외가 가장 멀리, 오래 달린 전부다.

특히 지난 5 년 동안 허리며 목까지 디스크에 시달리다 보니 재활목적으로 헬스장만 다녔지 그 흔한 러닝화 한번 신어 본 적 없다. 걱정만 한 아름 안고 모임장소에 따라갔다.


"자, 오늘 새로 달리러 오신 분들, 크루에 가입하게 된 계기나 각오 한 말씀씩 부탁드려요!"

"안녕하십니까. 달리기는 잘못하지만 끝까지 따라 달려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 저녁 8시부터 러닝이 시작되는 덕분에 떨리는 표정은 보지 못했을 거다. 잠시 뒤 리더라고 소개한 30대 남성이  홍천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말해줬다. 조기 마감 될 수 있으니 희망인원은 크루에서 종합받아 신청하겠다는 말을 했다. '마라톤?. 내가 알고 있는 그 마라톤 말하는 거야?, 20km. 40km를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그거?'.  제대로 달리는 법을 배워 본 적 없다. 호흡도 모른다. 첫날 달리는 방법이라며 몇 가지를 알려주긴 했지만 몸치였던 나는 양발이 따로 놀았다.


한 번도 달려보지 않은 러닌이, 중급자, 고급자,  사람이 나뉘어 달렸다. 거리는 각각 4km. 10km, 15km. 그래도 4km는 기본 체력으로 가능하겠지 했다가 큰코다쳤다. 이유는 나를 포함 5명이 러닌이 그룹에서 달렸는데 말만 그렇지, 마지막 300m 정도를 남겨두고 전력질주 구간에서 꼴찌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은 더 많은 여성 크루들에게.  슬리퍼로 갈아 신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걷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일주 일에 한 번씩, 두 번을 모임에 나갔다가 야근을 핑계로 그 이후로는 나간 적 없다. 퇴근 후 헬스장을 가는 것도 힘들 정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며칠 전부터 식탁에 앉아 책 읽으며 맥주 한 캔 마시는 게 반복됐다. 싱크대엔 치우지 않은 접시가 쌓였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퇴근 후엔 곧바로 근처 공원으로 운전했다. 새로 구입한 러닝화도 신었다. 10분, 30분, 시간을 늘리고 장소도 수시로 바꾸어 가며 달리기를 이어갔다.


"대회 참가 희망인원 접수받습니다!"


단체 채팅방이 무거웠다. 연이은 신청서 제출과 '해보자!'라는 권유의 글이 쉬지 않고 올라왔다. 엄지 손가락으로 주욱 읽어보다 '에이, 모르겠다. 나도 해보자. 설마 죽기야 하겠어?' 생각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젠 진짜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다.


얼마 되지 않아 집 앞에 낯선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배번호와 기록칩, 기념으로 나누어주는 마라톤 티셔츠였다. 손바닥로 옷 감촉을 느껴보니 까슬했다. 색은 하늘색.  그림이나 글 이 하나도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입어봤다. 거울 앞에 서봤다. 1009, 내 첫 마라톤 배 번호를 보자 비로소 실감 났다. '잘할 수 있겠지?'


옷을 벗어 현관문에 걸어뒀다. 일부러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하루 두 번은 꼭 보면서 막연한 걱정보다는 다짐을 하기 위함이었다.


달리는 연습을 많이 하면 조금이라도 더 쉬워질 줄 알았다. 대회에 나가 멋지게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나를 상상했다. 하지만 기록이나  달릴 수 있는 거리가 늘지 않았다. 한 번은 일요일 저녁, 연습 삼아 달렸는데  15km를 통과하자 무릎이 굽혀지지 않았다. 땅에 끌렸다. 한 순간에 내 다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러니 무섭기까지 했다. 대회 날까지는 보름도 남지 않은 날이라 그냥  아프다는 핑계로 아예 나가지 말까 라는 괘씸한 생각도 했다.


이틀을 쉬었다. 달려야 하는 걸 알고는 있지만 답답했다. 그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했다.   삼일째 되는 날 아침, 거짓말처럼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휴식도 훈련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저녁 여섯 시.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달리던 길 위에서 오늘은 천천히 걷기를 택했다. 어느새 단풍이 짙게 물든 게 보였다. 어느 나무는 이미 잎을 다 떨군 것도 있었다. 달리기를 할 땐 모르던 풍경이었다. 무작정 골인지점 만을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연구했던 나였다.


그러고 보니 숨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엔 저 멀리 보이는 공원 끝의 나무를 보면 도움 됐다. 힘들다고 고개를 숙이면 오히려 가슴이 수축되어 호흡이 쉽지 않다. 그럴 땐 양팔을 벌리고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속도를 줄이면 금방 호흡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나만의 속도로 달리면 돼. 대회 마감시간 2:30분 이내에 들어오지 못하면 어때! 완주만 하면 된다! 천천히 달려보자.' 곧장 집으로 돌아가 러닝화로 갈아 신었다. 일곱 시만 되면 무조건 달리기로 하고 오후 여섯 시 삼십 분에 알람을 맞춰놨다.


힘들고 피곤해서 마음이 흔들릴 땐 '달린다는 생각 하지 말고 저 멀리 산책을 다녀온다'라고 관점을 바꿨다. 그러면 골인지점이 아니라 주변 건물, 나무, 사람, 냄새 등 모든 걸 느끼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달리기가 통증을 참고 인내하는 시간이 아닌, 즐기는 놀이로 바뀌었다.


대회 일주일 전 처음으로 18km를 돌파했다. 시간은 1시간 50분. 더 달려볼까도 했지만 부상이 염려되어 나머지 2km는 천천히 걸었다. 공원 단풍 사진도 찍고 앞을 지나는 고양이와 눈인사도 나눴다. 나에게 필요한 건 더 나은 기록이 아니라, 나만의 속도였다. 달리기와 지금을 즐길 수 있는 속도.


'

속도를 줄이고 인생을 즐겨라.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은 주위 경관뿐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 모르게 된다
-에디 캔 터-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기록을 위해 달리는 건지, 건강하기 위해 달리는 건지. 성장이라는 건 쉬지 않고 운동을 열심히 해야 가능한 줄 알았는데 적절한 휴식과 마음 태도 역시 중요했다. 무작정  '빨리''에 빠져 있던 내게 즐거움을 먼저 터득해야 한 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니 비록 대회 날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완주할 수 있었고, 달리는 내내 힘들지만 저절로 웃음이 났다. 무슨 일이든, 내가 택한 일은 즐기기로 해봐야겠다. 그게 잘은 못하더라도 오래도록 할 수 있는 비법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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