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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병 김동휘·전투근무지원병 지준원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 부록 ①]

by 채성실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프롤로그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①] '수원 박새로이' 꿈꾸는 정비병 김요셉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②] "군대가 사람 두 번 살렸죠" 배차계원 안홍준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③] '군대가 만들어낸 A급 용사' 버스 운전병 이준혁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④] '꿀보직일줄 알았지만...' PX병 곽도엽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⑤] "미래에 대한 여러 갈림길이 생겼다" 통신병 권범수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⑥] "군대에서 도전을 배웠다" 대대 인사계원 이승원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시리즈를 브런치에 업로드하기 시작한 이후 몇몇 동기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기는 왜 인터뷰하지 않았냐는 동기도 있었다. 그들이 텍스트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 궁금해 늦게나마 인터뷰했다.

'헬보직'의 대명사 중 하나인 취사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김동휘 씨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뺑이치는 군 생활'을 했다. 해체 직전 부대에 자대 배치를 받아 4개월 동안 막내 생활을 했고, 새로 옮긴 부대에서는 취사병이 되어 정신없이 밥을 지었다. 그는 성격 좋은 동기들이 있었기에 낯선 환경에서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으며 간부들이 자신을 진지하게 원하는 모습에 괜찮은 1년 6개월을 보냈다고 돌아봤다. 지준원 씨는 단체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빠른 입대를 택했다. 18개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지내면서 '부대끼며 사는 법'을 배웠다.



■ '내 원수가 어떻냐고 물어본다면 적극 추천해줄 보직' 취사병 김동휘

img.jpg (사진 : 김동휘 씨 본인 제공)

취사병에 대해 소개해달라.


조리병은 자신이 소속된 부대의 모든 장병과 간부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보직이다. 식수 인원 50명당 한 명의 조리병이 붙으며, 우리 부대의 경우 취사 분대의 편제가 아홉 명이었다.


취사병의 일과는 어떻게 되나?


365일 내내 업무가 있다. 조식은 화부조라 불리는 세 명의 조리병이 만드는데, 이들은 다른 장병들보다 한 시간 삼십 분 일찍 기상해 취사장에 간다. 아침밥에 튀김이 포함됐거나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찬이 있는 날에는 더 일찍 일어난다. 중식은 09시, 석식은 15시 30분부터 조리를 시작한다. 물론 그전에도 미리 고기를 해동하거나 채소를 데치는 등의 조리 준비가 필요하다. 월·수·금 점심 즈음에는 요리 재료 등의 부식(副食, 군대에서는 밥 외에 모든 것을 부식이라고 부름)이 들어온다. 그럼 배식 인원 외 나머지가 전부 요리 재료를 냉장고, 냉동고, 창고 등의 장소로 옮긴 뒤 손질한다. 화요일과 목요일은 조미료와 기름, 그리고 장병들이 부식으로 받는 음료수나 라면 등이 들어온다. 이것도 취사병들이 받아서 전부 옮긴다. 격주 목요일마다 쌀 1.6톤이 들어온다. 취사병이 옮겨야 한다. 위 일과가 전부 끝나고 석식을 조리하기 전까지가 취사병의 쉬는 시간인데, 대부분은 휴게실에서 기절했다가 민간조리원 아주머니가 깨우시면 저녁밥을 한다. 석식 조리까지 모두 끝나면 모두 퇴근하고 한 명이 남아서 배식과 식기 청소 검사 등의 마무리 작업을 한다.


...일과에 대해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만큼 조리병이 힘들다.


대체 왜 취사병을 했나.


처음부터 취사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운전병으로 입대했다가 적성 검사에서 탈락해 소총수 주특기를 받았고, 지금은 해체된 제30기계화보병사단에서 통신저격소총수를 했다. (통신저격소총수?) 해체될 부대라 나를 마지막으로 신병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통신병 업무도 해봤고 장갑차 세탁도 해보고 일손이 필요한 일은 전부 다 했다. (아...) 4개월 동안의 막내 생활 끝에 부대가 해체되면서 타 부대의 본부중대로 옮기게 됐다. 행정반에서 대기하는데 인상 사나운 사람이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더니, 자기가 여기 급양관이라며 취사병 해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더라. 입대 전부터 요리를 좋아하기도 했고 군 생활 목표가 뭐라도 잘하는 거 하나는 만들어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선뜻 승낙했다.


자신의 보직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처음 봤다.


그만큼 내 군 생활이 파란만장했다. 부대 막내 소총수였는데 장갑차 운전해본 썰, 자대 전입 일주일 만에 오대기 임무를 수행하게 됐는데 인근 부대에서 탈영병이 나와 출동한 썰, 간부가 내 공모전 상 가로채서 신고하고 보직 해체 시킨 썰, 셋이서 밥 450인분 지었던 썰 등등... 이야기할 거리가 셀 수 없이 많다.


처음 취사병이 되었을 때 취사병에 대한 이미지는 어땠나?


공병에 버금갈 정도로 무거운 것을 많이 드는 보직이 아닌가. 전역할 때 즈음이 되면 벌크업 해서 나올 수 있겠구나 싶었다. 휴가를 많이 받으니까 조금만 참고 휴가나 많이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현시점에서는 취사병이라는 보직이 어떻게 느껴지나?


가장 힘든 보직. 내 원수가 어떻냐고 물어보면 적극 추천해줄 보직, 별로 안 친한 애가 물어본다면 절대 하지 말라고 뜯어말릴 보직.


취사병으로 일하면서 어느 순간이 가장 힘들었나?


앞서 말했지만 셋이서 450인분의 식사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정말 힘들었다. 또 올해 봄에 군 전체적으로 부실 급식 논란이 터지지 않았나. 위에서는 급식 문제를 개선한다며 계속 메뉴를 바꾸는 등 난리였는데, 급양관님이 전역 전 휴가를 나가셔서 분대장으로서 군수과장님과 직접 이야기하며 급식 문제를 관리해야 했다. 이때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취사병으로서 보람을 느끼거나 군 생활을 잘했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나?


급양관님이 전역하실 때 내게 자신이 개업할 레스토랑에서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스카웃 제의를 하셨다. 갓 사업을 시작한 거라서 한 명이라도 더 자기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만큼 일을 똑 부러지게 하면서도 합이 잘 맞고 인성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었다더라. 전역 전 휴가를 나간 상태에서 한두 번 부대에 오실 때마다 나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하셨다. 3~4년 있다가 공부가 잘 안 맞다 싶어서 연락해도 언제든 받아주겠다 하시길래 많이 고민했다. 전문하사를 하지 않겠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간부님들이 진지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모습을 보며 군 생활을 잘했다고 느꼈다.


입대 전의 김동휘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식적으로나 인간 관계 면에서나 얕고 넓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분야를 접해봤고 여러 사람들도 만났기에 오늘날의 내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군대에서 사회에서는 볼 일 없는 유형의 사람을 만나며 변화한 점이 있나?


없다. 다만 주변 사람들 덕분에 새로운 부대에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취사병은 중대와 독립된 일과를 보내니까 다른 처부 동기들이나 선·후임과 어색해지기 쉽다. 그런데 같은 생활관 동기들이 워낙에 유쾌한 친구들이었기에 무사히 친해졌다. 힘들 때 같이 버텨줬던 취사병 동기 (이)정민이, 후임 (봉)준호도 정말 고맙다. 특히 정민이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있다. 애가 너무 착해서 다 같이 힘든데도 남들을 조금 더 쉬게 하려고 자기가 더 일하고, 나랑 입대일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내 말년 대우를 해주겠다며 내 몫까지 일하곤 했다. 미안해서 나도 일하려고 출근하면 "왜 왔어! 빨리 가서 쉬어!!"하면서 생활관으로 돌려보내곤 했다. 나중에 단둘이 대화를 나눴는데 자기도 많이 힘들었다더라. 아직 미안한 감정이 크다.


마지막으로 군 생활에 대해 느낀 점은?


이기적으로 하는 게 잘하는 군 생활이라고 느꼈다. 자기 몸 간수는 자신이 하고, 이득 볼 것들은 챙겨가면서 해야 한다.



■ "1년 6개월 동안 부대껴 사는 법을 배웠다" 전투근무지원병 지준원

img.jpg 전역 전 휴가를 나가기 전날 밤, 동기와 후임들에게 축하를 받고 있는 지준원 씨. (사진 : 지준원 씨 본인 제공)

전투근무지원병에 대해 소개해달라.


전투근무지원병은 부대의 원활한 현행작전 유지를 위해 필요한 병과다. 평시에는 주로 작업을 도맡아 하거나 대대 시설을 보수한다. 전시에는 부대의 지휘소를 경계하거나 치중대(輜重隊, 군수 지원을 제공하는 전투 근무 지원 부대)로서 후방 지원을 한다.


※ 육군본부의 '2020 육군 병과 소개 자료'에 의하면 전투근무지원병과는 인사·군악·공보정훈·군사경찰·재정과 같은 행정병과 의무, 법무, 군종과 같은 특수병과를 모두 일컫는다. 전투근무지원병의 임무는 소속된 곳의 규모에 따라 조금씩 다르며, 지준원 씨는 대대급 부대의 본부중대 전투근무지원 소대원으로서 병역의무를 수행했다.


전투근무지원 소대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아버지께서 우리 부대의 상황병으로 군 생활을 하셔서 직계가족병으로 본부중대에 왔다. 소총수 주특기를 받아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저격·정찰 소대와 전근지 소대였는데, 당시 정찰병과 저격병의 TO가 다 차서 전근지로 들어가게 됐다.


처음 전근지 소대원이 됐을 때의 기분은 어땠나?


이름만 들었을 때는 무슨 일을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으니, 그저 무작정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현시점에서는 전투근무지원병이라는 보직이 어떻게 느껴지나?


바쁠 때는 한없이 힘든 곳이다. 예를 들어 부대 건물의 모든 전등을 교체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 작업을 맡은 전투근무지원병은 마지막 전등을 교체할 때까지 매일 그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그래도 일이 없으면 한없이 편한 곳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편하게 느껴졌다. 물론 함께 일했던 간부나 동기, 그리고 후임들이 좋은 사람들이었기에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


전투근무지원소대의 일과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


평시에는 작업이 주된 일과다. 행정보급관님께서 소대장님께 지시한 작업이 있으면 그 작업을 한다. 훈련 때는 지휘소 텐트를 설치하는 등의 작업을 했다. 작업도 훈련도 없는 날에는 생활관에서 잔다.


전투근무지원병으로 일하면서 어느 순간이 가장 힘들었나?


인사계원으로서 행정 업무를 담당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우선 간부들 사이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핀잔도 많이 듣게 된다. 그 중에서는 내 잘못이 아닌데 혼이 나는 일도 많았다. 행정 업무가 전체적으로 나와 맞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는 노후화된 창고를 철거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밀폐된 장소에서 창고의 용접 면을 용접해서 떼야 하는데, 계속 안 좋은 가스를 마시고 불똥도 자꾸 튀니까 괴로웠다.


전투근무지원병으로 있으면서 보람을 느끼거나 군 생활을 잘했구나 하고 느낀 순간도 있었나?


같은 소대의 중사님께서 내가 일하는 모습 보고 밖에서 그렇게 노가다하면 일당 30만 원은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지준원이 생각했을 때 입대 전의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나?


사회성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단체생활을 싫어했다. 지금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1년 6개월 동안 사람들과 부대껴 사는 것을 많이 배웠다.


군 생활은 결국 단체생활인데, 단체생활이 싫은데도 빠른 입대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어쨌든 대한민국 남성으로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가야 하지 않나. 이왕 가는 거 빨리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전쟁 영화를 좋아해서 군대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있었다.


인상 깊게 봤던 전쟁 영화가 있나?


엄밀히 말하자면 전쟁영화는 아니지만, 아무튼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라는 영화가 있다. CIA 요원들이 마약 조직을 소탕하는 내용의 영화인데 임무 완수를 위해 생사가 오가는 전투에 의연히 응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군 생활 도중 임무완수의 가치에 대해 곱씹게 된 에피소드가 있었나?


그런 것을 느낄 만큼 중요한 작전을 수행한 적이 없다. (웃음)


군대에서 사회에서는 볼 일 없는 유형의 사람을 만나며 변화한 점이 있나?


단체생활을 싫어했던 만큼 윗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도 많이 힘들어했다. 그런데 같은 소대의 중사님께서 자신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의연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배웠다. 별것도 아닌 일로 자신을 갈굴 때 속상하거나 억울하다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태연히 웃어넘기시더라. 나는 그럴 때 똥 씹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기에 저렇게 상황을 넘길 수도 있구나, 하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군 생활에 대해 느낀 점은?


입대를 앞둔 사람에게, 혹은 갓 자대 생활을 시작한 이등병에게 중간만 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열심히 하지 마라', '너만 손해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결국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어떤 형식으로든 돌아오게 되더라. 개인적으로는 지난 18개월이 충분히 유의미하고 값진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국가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보람을 느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으니까.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 부록 ②] 컵라면 익어갈 무렵 (2021 병영문학상 수필 입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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