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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 익어갈 무렵 (2021 병영문학상 수필 입선작)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 부록 ②]

by 채성실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프롤로그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①] '수원 박새로이' 꿈꾸는 정비병 김요셉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②] "군대가 사람 두 번 살렸죠" 배차계원 안홍준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③] '군대가 만들어낸 A급 용사' 버스 운전병 이준혁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④] '꿀보직일줄 알았지만...' PX병 곽도엽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⑤] "미래에 대한 여러 갈림길이 생겼다" 통신병 권범수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⑥] "군대에서 도전을 배웠다" 대대 인사계원 이승원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 부록 ①] 취사병 김동휘·전투근무지원병 지준원


6월 7일 일요일,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경. 새침한 장마 구름 몰려올 기미 없이 초여름 주홍색 노을빛만 가득한 해 질 녘이었다. 까까머리를 한 우리는 저녁 식사를 위해 동기 훈련병의 구령에 맞춰 하나 둘 셋 넷 번호 맞춰 연병장을 돌았고, 취사장 앞에 서 있던 무표정의 조교는 오와 열이 흐트러졌다는 이유로 이따금 고함을 질렀으며, 그럴 때마다 우리는 형체 없는 당사자를 원망하며 코앞의 까까머리를 힘줘 바라보고 그랬다.

일주일을 갓 넘기려는 군 생활은 귀가자와 훈련병을 가려내는 기간이었으므로 육체적인 어려움이 없었으나, 앞으로 남은 막연한 시간에 대한 아득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교와 교관들은 걱정으로 몸이 굳어버린 우리에게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일 것을 요구했고, 대다수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더욱 빳빳해졌다. 20년 남짓한 세월을 흐느적거리며 유영했기에 오차 없는 제식은 기본임에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여하튼.

그리움과 후회의 눈물이 담긴 편지 한 자 한 자 눌러쓰며 주말을 보냈을 병사들은 제각기 복잡한 낯빛으로 번호에 맞춰 걸어갔다. 그것은 곧 도착하게 될 취사장 안에 어떤 반찬들이 있을지에 대한 기대의 얼굴도, 혹은 휴짓조각처럼 녹아버린 휴일에 대한 아쉬움의 얼굴도 아니었다. 한나절 뒤 본격적으로 시작될 훈련에 대한 공포, 지금이라도 교관에게 달려가 퇴소 의사를 밝힐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아니었을까.

누구누구가 어떠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건 말건 늘 그랬듯이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고, 어느덧 우리는 연병장을 전부 돌아 부자연스럽게 양팔과 무릎을 들어 올리며 제자리걸음을 한 뒤 하나 둘 정렬을 외치고 멈췄으며, 조교는 무감정한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보며 빨강 조교 모자 쓴 이래 수백 번은 더 말했을 “반찬 양이 적으니 정량배식하고…” 따위의 전파사항을 전달했다. 특별할 게 없었다. 아니,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먼저 취사장으로 들어가는 선임 중대 훈련병들의 손을 가리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이 스쳐 지나갔을지 모를, 그러나 앞으로 몰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앎의 가치가 없었던 선임 중대 훈련병들. 그들은 서른 밤 정도 먼저 훈련소 정문을 지나쳐 왔다는 것 외에 겨우 입영 장정 딱지를 떼어낸 우리와 별 다를 바 없었으나, 그날만큼은 정면만 바라보라는 호랑이 조교의 주의도 잊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손에는 검정 바탕에 ‘新라면’이라는 글씨 석 자가 프린팅된, 흔하지만 꿈도 꿀 수 없었던 컵라면 용기가 쥐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빛났다. 유난히 구름 한 점 없었던 그 날 어스름의 노을은 마치 한 달 만에 인스턴트 식품을 취하는 그들을 위한 조명처럼 느껴졌다. 얼핏 보면 연병장과 취사장을 잇는 돌계단을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한 발 한 발 밟고 있었다.


그날 밤, 반찬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짬밥을 먹고 돌아온 우리들은 그동안의 다른 이야깃거리는 전부 내팽개치고 컵라면에 대한 흥분과 기대로 생활관을 가득 채웠다. 우리네가 목격한 것은 분명 비닐 포장이 뜯겨 있는 컵라면이었으며, 취사장에 들어섰을 무렵에는 후각신경을 말초적으로 자극하는 라면 국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면발 한 가닥 못 봤으나 상기한 정보만으로도 그 모든 무거운 감정을 떨쳐내기에는 충분했다. 우리는 보름 혹은 한 달 일찍 훈련을 시작했을 그들의 길을 고스란히 따라 밟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결국에는 컵라면을 먹을 수 있다!

갓 입대한 신병들, 그중에서도 특히 훈련병이란 참으로 예민해서 소소한 일에도 감동했다. 훈련소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노부부의 이발소에서 삭발을 부탁한 이후 처음으로 느낀 부풀어 오르는 희망이자 감동이었다. 그렇기에 멍하니 수면 위를 떠다니다 해파리에 쏘인 것처럼 강렬했다. 그 강렬한 감동이 두부모 같았던 의지를 질기고 튼튼하게 만들어줬을지도 모르겠다. 입영 주차 내내 머릿속 한 편에 머물렀던, 퇴소하고 도망치고팠던 마음을 깨끗이 지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명칭부터 심약한 소년도 귀신 잡는 군인으로 만들어줄 것만 같은 ‘정신전력교육’은, 사실 일주일 내내 강당에 모여 강의를 듣는 일이었다. 완공한 지 반년도 안 된 막사의 에어컨은 하자 없이 쾌청한 바람을 내뿜었다. 교육은 간혹 몇몇이 졸다가 지적받을 정도로 따분하기도 했다. 조교님 교관님과는 달리 불호령 내리지 않는 장교님의 말씀을 맞으며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훈련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함께 액체가 되어, 이윽고 증발했다.

야외 훈련은 힘들었다. 훈련도 힘들었으나 무엇보다 구식 탄띠와 6·25 전쟁 무렵 즈음 쓰였을 법한 방탄모를 매고서 경사 가파른 산길을 타는 일이 벅찼다. 밭길 지나가다 마주친, 베트남 참전 용사라는 노인의 요즘 것들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새하얀 피부 다갈색으로 태워버린 뙤약볕이 괴로웠다. 그럼에도 초여름의 하늘은 사진 한 장만 찍었음 싶을 정도로, 벌렁 드러누워 구름 지나가는 모습이나 지켜봤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거친 숨 내뱉다가도 고개를 들면 그 장엄함에 넋을 잃어 힘들다는 생각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비구름에 자리 내주기 위해 바삐 지나가던 뭉게구름처럼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갔다. 머리 희끗하던 노인이 수십 년 전 아들자식 생각하며 밀어줬을 삭발 머리는 어느덧 한 번 밀 때가 됐다는 소리 들을 정도로 자랐고, 붙임성 좋은 일부 훈련병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조교들과 전화번호도 교환하고 그랬다.

그새 컵라면과 관련된 소소한 추억도 생겼다. 우리네에게 일을 시킨 사이 컵라면에 물을 받고 조교 생활관으로 유유히 사라지던 훈육분대장의 모습, 야밤에 컵라면을 들고 가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엎어진 컵라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욕하던 조교의 모습 등이 인화 사진처럼 기억에 남았다. 맛의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라면에 대한 갈망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깟 산길 좀 탔다고 핏기 싹 가셨던 행군 때에도 휴식 지점에서 한입에 털어 넣을 컵라면 상상하며 버틸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그날 우리가 간식으로 받아든 것은 손가락만 한 초코바였지만.


6월 21일 일요일, 보름 전과 마찬가지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날. 우리는 부식으로 컵라면을 배급받았다. 편의점에서 1300원 남짓한 금액에 구입할 수 있는 신라면 대컵. 사회에서는 항상 볶음면류 따위를 사 먹느라 거들떠도 안 봤던 신라면이, 어쩜 이렇게 맛있어 보일까! 평범한 컵라면 용기일 뿐인데 그렇게 고급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어린 왕자가 오기만을 목 놓아 기다리는 여우처럼, 다가오는 저녁 식사 시간이 기다려졌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 한 아름 안고 어머니 차에서 내렸던 입영일 날 그랬듯이, 이날 또한 조교들은 교육 대상자가 흥분에 젖어있든 말든 상관 안 쓴다는 듯한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식사 집합을 알렸다. 복도에 나란히 2열로 정렬한 뒤, 막사를 나와 하나 둘 셋 넷 외치며 연병장을 돌았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오른손으로 스프 담긴 컵라면 용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왼팔은 굽히지 않은 채 구령에 맞춰 앞뒤로 힘차게 흔들고, 오른팔은 행여나 라면 용기 떨어뜨릴까 부드럽게 감싼 채 앞으로 나아갔다. 후임 중대 훈련병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날 나는 방탄모에 맺힌 땀방울만 한 꿈을 이룸과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이 되었다.

행복했다. 이동식 전기 국솥에 국물 대신 담긴 뜨거운 물 컵라면 용기에 부은 뒤, 몇 초 간격으로 손목시계 바라보며 빨리 3분이 지나가기를 바랬다. 그리고 채 3분이 지나가기도 전에 개봉해 설익은 면발을 흡입했다. 아직 충분히 풀어지지 않아 딱딱함이 남아있는 면발도 꼬들꼬들하니 기분 좋게 느껴졌다. 사회에서는 컵라면을 먹을 때 종이 뚜껑을 고깔 모양 컵으로 접은 뒤 면발을 담아 먹곤 했다. 그러나 이날은 그런 사사로운 일에 신경 쓸 심적 여유 없이 젓가락 가득 면발을 집어 든 뒤 후루룩, 하고 빨아들였다.

장기간 자극에 노출되지 않은 영향인지, 처음 라면을 접한 초등학교 1학년 때처럼 눈물 콧물이 전부 나왔다. 입이 얼얼했다. 국물에 밥을 말아 먹다 포기하고 후식으로 나온 치즈 크림 콘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뜯은 뒤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단’과 ‘짠’의 완벽한 조화. 방금 전까지는 매워서 눈물이 났다면, 이번에는 행복함에 눈물이 나왔다. 입대 후 처음으로 1000kcal가 넘는 한 끼 식사였다.


더 이상 입에서 고춧가루 분말 섞인 내가 안 날 즈음, 나는 훈련소를 수료했다. 무수한 이들의 땀과 눈물로 적셔졌을 훈련복 대신 첫돌 맞이한 전투복을 입게 됐으며, 국방색 벨크로 테이프가 어색하게 자리 잡고 있던 왼쪽 가슴팍에는 이등병 약장이 달렸다. 모두가 동등한 전우였던 훈련소를 떠나, 내 밑으로 아무도 없는 막내 생활을 시작했다. 컵라면 하나 먹기까지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나는 대한 국군의 육군 장병으로 거듭났다.

꿈을 재고할 정도로 내성적이던 성격은 훈련소를 수료할 즈음 생활관 동기들과 번호를 교환하며 헤어지는 수준까지 열렸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마음이 편할 만큼 힘들게, 그러나 상쾌하게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 모든 다짐과 변화 끝에, 8월 29일 오후 7시 23분, 호랑이 장가가는 날. 나는 아직 냉동식품 냄새 머물러 있는 다용도실에서 떳떳하게 라면 면발이 익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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