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킬로가 되면 수술을 시켜준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는 어떻게든 아이의 몸무게를 늘리고 싶었다. 또래 아이들의 수유량보다 3분의 1밖에 먹지 않아서 인지 아이는 자라지 않았다. 젖병을 빨지도 수저로 흘려내려 주는 분유를 잘 삼키지도 못했다. 조금 자라는 듯하면 아이는 열이 나고 기침을 하는 폐렴에 자주 걸렸다. 그때마다 내 기분은 오르락내리락하며 아이의 먹는 것에 따라 하루가 살만하다가도 절망에서 가라앉아 속상함에 울어야 하는 시간도 길었다.
구순구개열의 선천성 기형을 가진 아이들이 100일 쯔음에 1차 수술인 입술을 만들어 주는 수술을 하는데 딸아이는 8개월쯤에야 겨우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수술을 하고 나서도 아이의 양쪽이 갈라진 입술 중 한 곳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진물이 수술부위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항생제를 한 달이 넘게 먹어도 염증이 생긴 부위는 낫지 않았고 계속 다시 갈라지려고 했다. 다시 찾은 병원에서는 상처부위가 덧이 낫기 때문에 염증을 다 긁어내고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전신마취를 하고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상황에 나는 쉽지 않은 아이의 치료과정이 너무나 속상했다.
힘들게 수술을 했는데 덧이 나버리다니 서울에서 내려오는 차 안에서 나는 너무나 절망스러워 내가 앉아있는 차 좌석 시트 아래도 고개를 집어 넣고 울어버렸다. 모든 사람에게 따스하게 비추는 햇빛마저도 나의 절망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세상을 또 다시 등지고 싶은 마음에 가장 어두운 곳에 얼굴을 박아두고 고통스럽게 울었다.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치료를 위해서 가는 한 발 한 발이 빙판 위의 얼음이 곧 깨질 거 같은 걸음이었고 조심스럽게 내딛기 시작하면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나는 거 같았다. 입술뿐만 아니라 입천장까지 뚫려 있는 안면기형이라서 아이가 먹는 분유나 음식은 자꾸 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염증이 날 것을 대비해서 고막에 튜브를 박는 수술을 했는데 그 수술 부위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름이 귀 밖으로 계속 흘러나왔다.
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항생제를 계속 먹게 되자 아이는 면역이 급격하게 떨어져 나타나는 병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구창으로 입 안이 다 하얗게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세균이 원인인가 싶어 온 집을 하루종일 알코올로 닦아내고 문과 창문부터 구석구석을 하루 종일 소독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독을 하고 닦아내도 아이의 아구창은 낫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치료가 되지 않자 병원에서는 항생제를 오래 복용해서 생긴 문제라고 했다.
본인 스스로 가지고 있는 면역이 유리알 같은 아이였다. 조금만 무리를 하면 쨍그랑 깨질 거 같아서 늘 조심히 다루어야 했다. 결국 수 없이 긴 시간 동안 나온 고름은 항생제내성균이라고 했다. 들어보지도 못한 MRSA균으로 아이는 격리가 되어야 된다고 했다. 아이의 고름을 닦거나 치료를 받은 의료물품들은 주황색 비닐봉지에 담겨 누군가의 손이 닿지 않게 폐기되야 했다.
왜 이런 균에 감염이 된 거냐고 물어보자 수술실이나 중환자실 등의 병원에서 떨어진 면역을 틈 타 감염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는 수술의 흉터가 잘 낫지 않았고 귀에서는 진득하면서도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고름이 몇 달 동안 끊임없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술과 치료 과정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아이에게 미안했던 것은 입술 수술을 하면 수술 부위가 벌어지지 않도록 아이의 손을 부목으로 꽁꽁 묶어둬야 하는 것이었다. 양 쪽의 팔을 접거나 손이 입에 가지 못하도록 2달 가까이 우리는 매일 나무 부목으로 팔에 댄 다음 끈으로 아이의 팔을 묶어두었다. 팔 조차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아이였다. 코에는 돼지코처럼 생긴 실리콘을 콧 속에 넣어서 코를 반창고로 붙여두었다. 아이는 숨쉬기 어려운 갑갑한 장치까지 하고 오랫동안 불편하게 지내야 했다.
남편과 나는 힘든 1차수술과 치료과정을 지나 아이의 코와 입이 어느 정도 만들어진 것을 보고 사람에게 입과 코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건지 감격하며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이가 수술로 만들어진 입술로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쉰다는 게 너무나 감사했다. 구순구개열의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나는 모든 사람이 온전한 입술과 코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처럼 만들어지지 못하고 태어날 거란 상상이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입술 수술을 마치고 아이는 조금씩 이유식도 시도해 볼 수 있었다. 좋은 재료로 정성껏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잘 먹는 듯하다가도 여전히 반복되는 열과 기침증상의 폐렴에 자주 걸렸다. 한번 가래와 콧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치료기간이 길었고 그때마다 다시 멈추는 아이의 성장에 가족의 시간마저 함께 멈추는 듯했다.
열심히 먹이고 키우려고 애를 써봤지만 잘 자라지 않는 아이였다. 아이의 성장속도는 또래 아이들의 절반의 속도였다. 돌잔치를 몇 명 지인과 간소하게 하고 집 앞 벤치에 앉아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이는 돌 정도의 아이가 아니라 5개월 정도의 아이처럼 작았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이렇게 자주 아프지? 옹알이를 하지도 않고 걷지도 못하는 거지? 몸무게가 늘지 않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조금씩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이 아이는 절반씩 느리게 자라는 걸까? 입술만 아픈 게 아닌 걸까? 설마.. 다른데도 아픈 걸까?.... 구순구개열로 아픈 아이들의 대부분이 입의 기형으로만 태어났지 우리 아이처럼 느리게 자라는 아이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왜 이러는지를 물어보고 성장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병원에서는 아이의 염색체를 검사해 보자고 했다. 할 수 있으면 부모의 유전자도 함께 검사하면 좋다고 했지만 비용이 너무나 비싸고 우리 가정의 재정으론 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원인을 알게 된다고 해도 염색체의 문제는 의학적으로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염색체질환이라서 현대의학으로는 염색체를 정상적으로 만들어줄 의료기술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 그래도 아이의 성장이 느린 원인을 알고 싶었다. 원인을 알아야 부모로서 최소한이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알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