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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May 23. 2022

루살카

Rusalka,

인간의 딸이었던 여인이여

사랑을 잃고 너는,

너무나 투명해서 바닥마저 보이는

깊디깊은 호수로 몸을 던졌지

물에 빠진 처녀들에게는

천국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

동정 없는 천국은 지옥에 다름없어

이승에도, 저승에도

발 붙일 곳 없는


사랑을 얻지 못한

혼령들!


호수에 누운 채

가 닿지 못한 마음인양

붉은 달 바라보며

피 눈물을 흘릴 때


Rusalka,

너의 노랫소리는

졸, 졸, 졸,

시냇물 되어

인간의 세계로 흘러들어 가누나, 기어코

미련의 길이만큼

네 검은 머리칼도 한 뼘 더 자라

숲을 다 덮치겠네

놀란 암사슴

커다란 눈망울만 끔뻑끔뻑


푸른 안개 자욱할 때

함부로 숲에 들어서는

어리석은 왕자

순진한 암사슴의 정수리에

화살을 꽂네

눈과 눈 사이로 흘러내리는

양귀비처럼 붉은 피

호수에 퍼지면


Rusalka,

죽은 자도 서러워

밤을 새워 우느나

밤의 숲에는 언제나

비극이 깔려 있누나


더 이상

아무도 오지 않는

숲 속 그늘에 몸을 숨기고

달에게,

너는 노래한다

죽어서도 못 잊을

어리석은 왕자에게

가 닿지 못할

사랑을,

한숨을,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i/1837~1887), 슬라브의 인어 루살카


루살카는 러시아나 체코 등 슬라브 민족의 설화에 나오는 강의 요정입니다. 인간 소녀가 물에 빠져 죽으면 루살카가 된다고 알려져 있지요. 머리카락이 길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되는데 강가를 걸어가는 남자가 있으면 유혹해서 강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린다고 합니다. 성령강림절 이후 여름 동안은 숲에 살면서 노래하거나 춤추거나, 나뭇가지에 앉아서 보내며, 수수께끼를 좋아해서 인간이 수수께끼를 풀면 풀어주기도 합니다. (네이버 환상 동물사전 참조)


루살카는 우리나라의 처녀귀신과 비슷하게 하얀 원피스를 입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닷가 암초에 앉아 어부나 선원을 유혹해 물에 빠져 죽게 하는 세이렌과도 흡사하지요. 발레 <지젤>에 나오는 주인공 지젤 또한 죽어서 숲에 사는 처녀귀신이 됩니다. 인어공주도 문득 떠오르는군요.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젊은 여성들의 한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한 정서를 주나 봅니다.


드보르작의 오페라 가운데 <루살카>가 있습니다. 숲의 정령인 루살카가 인간 세계의 왕자님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인간이 되지 못해 삶과 죽음 사이를 영원히 떠돌게 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가진 이 오페라에는 아주 아름다운 아리아가 들어 있습니다. 루살카가 왕자님을 떠올리며 부르는 노래인데요. 세상을 두루 비추는 달님에게 자신의 사랑을 왕자님에게 전해 달라는 절절한 마음이 우아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에 더해져 오페라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최고의 아리아로 꼽을 겁니다.


라일락 꽃향기가 풍기는 늦 봄의 밤이 되면, 어김없이 루살카의 노래를 듣게 됩니다. 인간의 세상에서 인간이 되어 사랑을 하고 팠던 그녀의 소원을, 달을 보며 대신 빌어 보게 됩니다. 비록 이뤄지지 못했을지라도 누군가는 그네들의 슬픔을 기억해주고 있음을...




최고의 루살카로 칭송받는 루치아 폽이 부르는 'Song to the Moon' https://youtu.be/yvenKSl2AG8


표지 이미지: 콘스탄틴 바실리예프(Konstantin Vasiliev 1942-1976, 러시아 화가), 루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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