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오늘은 어떤 재밌는 일이 일어날까?

2. 나와의 시간 잘 보내기

by 실타래 Jan 19. 2025

사직원이 처리되자마자 제주도로 떠났다. 여행으로 여러 번 오갔던 곳이지만 살이를 위한 여정은 또 달랐다. 당시 난 자연의 안락함 속에서 아무도 관심을 주고받지 않을 조용한 안식처가 필요했다. 모든 SNS를 끊어둔 채 혈혈단신으로 비행기에 올랐던 5월의 새파란 하늘을 기억한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 흘러나왔다. 노래가 역주행을 하기도 전에 난 이미 이 곡에 깊이 빠졌더랬다. 이전의 삶은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던져 버리고 기어코 이다음으로 넘어가겠다며.


성산의 조그만 게스트 하우스 스텝 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그곳에서 운 좋게 동갑내기 스텝 친구들을 만났다. 사회에서 만난 사이였다면 응당 물어봤을 질문들을 우린 서로에게 하지 않았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와 같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면서 알게 된 정보도 물론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우린 알고 있었다. 밤이면 바닷가 앞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다 짭짤한 바다 내음으로 해장을 하고, 취기가 밀려오면 그대로 드러누워 눈앞의 별들을 세어보는 것만으로 청춘은 충분했다.


별 보기를 좋아했던 스텝 친구들과 매일 삼촌과 이모가 해주신 밥상

손님들 역시 나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난 그저 그들의 널브러진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즐거운 저녁 파티를 제공하는 직원일 뿐이므로. 그렇게 생애 처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 자신을 마주 보게 됐다. 이곳에선 내가 이룬 어떠한 성취도, 타이틀도 쓸모없었다. 온전히 나로서 숨 쉬는 동시에 무한과 같은 자유가 주어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삼촌, 스텝들과 함께 아침을 해 먹고, 청소와 이불 빨래를 하면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텅 빈 시간만이 날 반겼다. 근무라고 해봤자 프런트에서 손님들을 안내하거나 저녁 파티 준비를 하는 것뿐이고, 근무마저 하지 않는 날은 정말 말 그대로 '자유'였다. 그토록 바라왔던,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


 할 일이 없을 때 난 뭘 하던 사람이지?

 

파워 J의 To-do list는 여태껏 한 번도 비워져 본 적이 없었다. 학부생일 땐 해야 할 과제와 아르바이트 일정으로, 취준생일 땐 각종 자격증 공부와 자소서 마감일로, 직장인일 땐 해야 할 업무와 밀린 약속으로 가득하던 캘린더가 갑자기 텅 비워졌다. 짧아서 달콤한 주말이 아니라 정말 원하는 만큼 쉴 수 있는 장기 휴가가 주어졌는데도 그저 불안했다. 사실 할 건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런데도 난 아무것도 계획하고 싶지 않았다. 살던 삶과 정반대의 방식을 택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게으르게 늘어져보기로 했다. 마음껏 읽고 싶던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오랜 시간을 들여 먹고 싶은 요리를 해 먹었다. 그저 발 닿는대로 라이딩을 떠났다 어두워지면 닿게 된 동네에서 하루를 묵었다. 아무것도 안 한 채 가만히 바닷가에 앉아 해가 떠오르고 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 날도 있었다. 그렇게 순간순간에 충실히 날 내던지다 보니 눈을 뜨면 '오늘은 뭘 해야지'를 계획하는 게 아니라 '오늘은 어떤 재밌는 일이 일어날까?'를 기대하게 됐다.


평소라면 하지 못할 것들도 많이 경험했다. 다른 사람의 하루를 무작정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추억이쌓였다. 갑자기 배낚시를 가게 된다거나, 처음 본 사람들과 함께 시장에서 국밥을 먹게 된다거나, 카약을 탄다거나. 내가 미처 모르고 살았던 세상에서 삶은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한 가지 길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만난 모든 사람들의 삶은 존경스러웠고, 이내 난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됐다.



사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난 나와 함께 해야 했다. 크게 어색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 시간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낯선 환경에서의 새로운 나와 이전에 알고 지냈던 나 사이의 괴리뿐만 아니라,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치유받지 못한 상처들이 혼자만의 시간을 잡아먹고 몸집을 키웠다. 나를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불안정한 내면이 보였다. 난 바다의 윤슬과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에도 금방 행복해지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무심히 스쳐가는 바람결에, 검붉은 노을 자국에 베이거나 데이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오래도록 자세히 지켜보면서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긴 쉽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정면돌파해야만 했다. 1인 창작자로 살기로 한 이상 앞으로 내 창작도구는 나 자신이고, 이 도구를 잘 알지 못하면 제대로 쓸 수 없다.


힐링의 시간을 충분히 갖고 서울로 돌아와 나를 좀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예전에는 '굳이?'라고 생각했던 질문을 더 깊이 파고들고, 혼자선 못할 것 같았던 짓들도 해보면서 자신을 재정의했다. 이 과정은 점차 즐거워져서 나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세밀한 나만의 취향과 감각을 만들어내는 결과를 낳았다. 새삼 몰랐던 내 모습이 또 튀어나온다고 해도, 그게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면모라 해도, 이젠 괜찮다. 그걸 받아들임으로써 나라는 도구가 더 단단해지고 활용성도 넓어질 것임을 알기에 그저 재밌을 뿐이다.




혼자 라이딩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

독자 여러분도 내일 아침 눈을 뜰 땐 오늘은 어떤 재밌는 일이 일어날지, 어떤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지 기대하게 되시길 !


이전 01화 제 직업은 지망생입니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