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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letterpot Dec 21. 2021

의자 밑을 다듬는 사람

Listen to your mind

내가 잘 아는 나의 특징 중 하나는 '누가 볼 때만 열심히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할 때도 그렇고, 청소나 사소한 집안일조차도 그렇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좀 치사하고, 요령을 부리는 편이다. 수련을 하는 요가 매트 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선생님이 옆으로 지나가거나 나를 보는 것 같으면 힘이 바짝 들어간다.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막상 그 자유가 반갑기보다는 좀 부담스러웠다. 수업을 안 듣고, 시험을 망쳐도 옆에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공부할 이유가 없어 1학기 성적은 학사경고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수준이었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고, 더 미룰 수 없으면 겨우 대충 마무리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마주한 각자도생 사회에서 나는 잡아먹힐 준비를 마친 느린 한 마리의 임팔라 같았다.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나는 어렴풋 알고 있던 나의 '보여주기 식' 특성을 이용해야 했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율성을 거둬들이고, 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스스로를 내모는 방법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공부하는 스터디 모임, 날짜가 임박한 자격증 시험,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은 오픈된 카페... 혼자 있으면 하염없이 늘어지는 몸을 보는 눈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놓아 누울 수 없게 했다. 편안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효과는 있었다. 벼락치기든 뭐든 성적이 오르는 것을 보며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그때 나는 여전히 강제로 야간 자율학습을 해야 했던 고등학생에서 조금도 자라지 않았던 것 같다. 


성적이 오르는 효과는 있었을지 언정, 보여주기 식으로 하는 공부에서 성장이나 성취를 얻을 순 없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에 맞추어 그때그때 다른 모양의 틀을 바꿔 낄 뿐이었다. 어떤 평가를 받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가짜 같았다. 나에게 칭찬을 하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는 눈이 없다고, 나는 가짜라고. 


겉으로 이루어내는 것들과 상관없이 내 자존감은 자꾸 작아져갔다. 혼자 있을 때는 여전히 누워있고, 무기력하며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반비례하는 외적인 성취와 내적인 자존감의 관계를 보며, 나는 자존감은 누가 볼 때의 내 모습과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그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효리 씨가 나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남편인 이상순 씨와 의자를 만드는데, 그가 보이지도 않는 의자 밑바닥을 열심히 다듬고 있었더랬다. 그걸 보고 그녀가 아무도 안 보는 곳인데 대충 해도 누가 알겠냐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알잖아."





그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자신은 볼 수 있는 의자 밑을 정성스레 다듬는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와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스러운 의자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남이 생각하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인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인생을 전자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부끄럽지만 내가 살아오며 만든 의자들의 밑바닥은 하나도 안 다듬어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혼자 있을 때의 태도와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 나만 아는 세상에서의 내 모습을 생각한다. 너무 많은 시간을 게으르게 허비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크고 작은 허들을 스스로 설치하고 걸려 넘어지는 나만 아는 세상에서의 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내가 가여워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넘어져 있어도 누가 봐주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았던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등 뒤로 감추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한때 한국에서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낮은 자존감으로 꼽는 자존감 만능주의가 만연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냐에 집착하다가, 이내 자존감 타령을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자존감 높이는 방법, 자존감 높은 사람들의 특징 등을 아무리 읽어도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것. 


누구도 보지 않는 의자 밑을 다듬는 일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쌓인다. 가족들이 모르게 방문을 닫고 숨어서 폭식하는 나에게 손을 내밀고,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 '이 말은 하지 말 걸' 내내 후회하는 나에게 손을 내밀고, '**씨는 늘 밝은 사람'이라는 평가 뒤에 가려진 우울한 내 모습에 손을 내밀어 보자. 손을 내미는 용기와 손을 잡는 용기가 만나 사랑이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쌓여 자존감이 된다.

나는 얼마 전부터 새벽 마이솔(Mysore) 수련을 시작했다. 아쉬탕가 마이솔 수련은 다른 요가 수업들과는 다르게 앞에서 보여주는 선생님의 데모(동작 시연)나 티칭이 없다. 정해진 시퀀스를 매일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호흡으로 해나가는 수련이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모두 다른 동작을 하고 있기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당황하기도 한다. 저녁형 인간이며,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강하게 동기 부여되는 나에게도 새벽 마이솔 수련은 큰 도전이었다. 





그리고 아직 해도 뜨지 않는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는 날들이 쌓이며, 또 한 번 알게 된 것은 이 시간이 나의 의자 밑을 칠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나는 나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고르게 숨을 쉬고 그 힘으로 가슴을 열고, 다리를 펴낸다. 그리하여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단단하고 부드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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