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밖으로 꺼낼 필요 없으므로
또 이 계절이 왔다. 눈 뜨자마자 두 창문을 열어젖히자 냉기와 근심 같은 것이 엄습한다. 지장이 없을 정도지만 일과가 조금 밀렸다. 왜냐하면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내 창문을 충분히 열어두자 집안의 온기가 고대로 형체를 유지한 채 한 생명에 닿고, 그를 데워주는 상상을 한다. 기질 탓이겠거느니 하는 것이, 일 년의 반이 영하 삼사십 도의 날씨가 계속되는 그곳에서 밖에 서 있는 내 차가 얼어붙지 않을까 마음에 걸린 적이 많다. 거기 살았던 육칠 년간 아마 두 번쯤은 나가서 차를 쳐다보고 온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볼 때 그저 고장이 날까 신경이 쓰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추억이나 생각들은 주변에 말할 것이 못 된다. 주변 사람들이나 특히 가족들에 괜한 심려를 끼치게 된다. 또 계절에 대해 품는 마음이란 그저 스치는 생각밖에 더 되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겠으며 또 봄이 오지 않는가. 그곳, 미네소타에도 매년 새가 날지 않던가.
작년에 살던 곳에는 개들을 풀어둘 수 있던 작은 공터가 있었다. 잡초가 자란 흙밭인데 보기에는 안전해 보여도 개처럼 맨발로 걸어봐야 발에 무엇이 걸리는지 알겠다 싶어 맨발로 걸으며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걸러내곤 했다. 그것과 비슷한 심정일지 모르겠다. 오늘 아침처럼 초겨울의 날씨가 엄습할 때면 반바지 반팔을 입고 맨살을 바깥공기에 대어본다.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도 문제없었던 어제, 그 옷을 그대로 입고 나섰다. 추운 줄 알면서도. 나오자마자 정신이 번쩍 든다. 이 옷으로는 안 된다. 개들은 내의에 보온용 옷을 덧입혀 나와 다행이라 생각하며 몸에 열기를 끌어내고자 한참을 셋이서 뛰어다녔다. 아침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후디와 긴바지를 꺼내 점심 산책에 나설 작정을 했다. 사계절 같은 모습으로 지내는 모든 것들은 이 겨울을 어떻게 나나.
여름에 그들이 뒹굴고, 날고, 쪼는 모습을 보면 대지의 축복이 어린 명랑한 모습으로만 비친다. 매년 겨울의 초입, 그러니까 오늘이 되고 맨살에 찬 공기가 닿기까지 해야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나 얕기 짝이 없는지 실감한다. 이번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또 마냥 사랑스럽게만 보일 테지.
그때의 까치와 비둘기, 고양이 따위의 것들은 오늘과 같은 옷을 입은 채 같은 모습일 테다. 그런데 그때의 그들이 오늘 이들이 맞나.
씁쓸하여 검색해본다. <고양이, 새, 야생동물, 겨울, 어떻게, 어디......>
괜찮단다. 여전히 마음이 안 놓인다. 옷을 껴입고도 마음을 못 달랬다고 투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