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 이제는 좀 버려...
이 집에 들어오기 전의 집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비어있는 빈집이었다. 쾌척하고 뻥 뚫려있는 큰 집. 그러나, 지금 집안을 둘러보면 온갖 버려야 할 것 투성이에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집에서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건 내가 아닌가? 살아가는 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이 이렇게나 많은 쓰레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정리하지 않는 나를 보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사실, 귀찮아서 정리를 하지 않아 버리지 못하는 것들도 좀 있다.
가장 먼저 하루 날을 잡고 정리를 해야 할 게 있다고 하면 아마 옷들이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잘 입지 않는 옷들. 불어나버린 몸뚱아리 때문에 이제는 자연스럽게 쫄쫄이가 되어버린 티셔츠들과 바지들. 어쩌면 제일 먼저 정리를 해야 함에도 옷을 한 번 쓱 들춰보고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거 살 조금만 더 빼면 입을 수 있지 않을까?”
옷장을 정리하면서도 뭔지 모를 아까움에 쉽사리 정리하지 못하는 옷들이 있다.
“와... 좀 비싼데. 이거.”
“어차피 이런 옷들은 한 번 사면 5년은 입어.”
“그렇지?”
싸고 간편한 대신 쉽게 망가져 오래도록 입지 못해 해지면 버리는 옷들이 있는가 하면 한 번 살 때 큰마음을 먹고 손을 부르르 떨며 구매하는 옷들이 있다. 그런 옷들을 정리하려고 하면 항상 마음속에서 ‘불어난 게 내 몸이지. 옷이 잘못한 건 아니잖아.’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금 다이어트라는 목표에 두 손을 불끈 쥐게 만든다.
[ 영화 '스플릿' ]
“볼링이 왜 재밌는 줄 알아? 다음에는 스트라이크를 칠 것 같거든.”
영화 ‘스플릿’에 나온 대사처럼 다음에는 꼭 살을 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가지고 죄가 없는 옷들을 옷장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몇 달 뒤 먼지가 가득 쌓인 옷장을 정리하고자 하면 마치 고장이 난 녹음기처럼 똑같은 말을 되내이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집정리를 할 때면 정리해야 할 것이 꽤나 많지만 대부분이 쓰레기가 되어가는 쓰지 않는 물건인 것 같다. 이제는 입지 않는 옷처럼 이제는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 잊혀진 사람들이 있다. 뭐 지금도 당장 버릴 수 있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떠나간 인연들과의 스티커 사진들을 괜스레 서랍 한 장에 모아놓고 있는 것 같다. 우정을 증명하는 표시도 아니고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인데 괜스레 조금 버리기 힘든 느낌이다.
“여보세요?”
“네. 전화받았습니다.”
“뭐야? 너 내 전화번호 없어?”
“아... 제가 최근에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나야.”
쓰지 않는 물건들처럼 이제 더 이상 닿지 않는 인연들과 볼 수 없는 관계들이 있음에도 이상하게 그 관계를 정리하지 않게 되는 것 같다. 핸드폰 번호를 정리하지 않고 카톡방을 정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과의 추억이 쌓인 사사로운 물건이나 사진들을 굳이 정리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연락도 안 하는 카톡방 부산스럽게 왜 들어가 있어? 그냥 정리하면 되지.”
집에 있는 쓰레기를 정리하는 것보다 먼저 정리해야 되는 쓰레기 같았던 관계들이 있다.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활짝 웃고 있는 가면을 쓰고 상대를 마주 봐야 했고,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굳이 듣기 싫은 이야기를 걸러들으면서 만나야 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도 사회생활이자 인간관계랍시고 정리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마 집이 조금씩 더러워지는 것 같다. 뭐... 기본적으로 청소를 잘하지 않고 성실하지 못한 내 핑계이기도 하지만 이사를 해도 쉽사리 지나간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좀 있는 것 같다.
“야... 이거 진짜 너무 옛날 아니냐?”
“이때가 재미있었지.”
“이건 언제 거냐?”
“이거 오래 안 됐어. 한 3년?”
“오래됐네. 좀 버려.”
살다 보면 정말 자잘한 물품이나 쓸데없는 잡동사니에 추억이라는 감정을 집어넣어 쉽사리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들이 꽤나 있는 것 같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사진 한 장이나 데이터 쪼가리로 치환해서 쉽게 보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집안의 한 공간을 내어줘야 하는 그런 잡동사니들. 남대문 시장에서 도금한 싸구려 트로피와 수천, 수만 개는 동시에 뽑았을 법 한 메달들. 문방구에서 산 1000원짜리 액자에 조금은 값어치가 나가는 빳빳한 500원짜리 고급용지로 속을 채운 졸업증서들과 수료증들. 지금은 하등 쓸모없는 그런 잡동사니이자 굳이 정리하면 꽤나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음에도 버리지 않는 것들 대부분이 아마 지금은 전혀 필요하지 않은 ‘내가 살아왔던 증표’들 같다.
“그래도 저거 하나 받으려고 4년을 고생했잖아.”
그렇지. 사회에 나와보니 누구나 가지고 있는 졸업증. 저거 하나 받으려고 20대의 절반 이상을 사용했지. 대부분의 잡동사니들에 노력이 없는 물품이 없었다. 성적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듣기 싫은 말들을 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집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건 과거에 대한 내 미련과 후회가 아닐까 싶었다.
“야... 씨... 개소리하지 말고 집이나 치워.”
“네. 알겠습니다.”
마음속에서 양심이라는 놈이 갑자기 내게 소리를 치는 것 같다. 헛소리 할 시간에 집정리 좀 하라고. 일단 분리수거부터 하고 와야겠다. 크흠... 뭘 버려야 하나... 일단 100 사이즈 티셔츠들부터 다 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