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 - 무작정 상경

From 1919 to 2022

by 시드니


박정희는 유신헌법으로 제4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지수가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들은 모두 흰 가제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지수는 그것이 콧물을 닦는 수건이란 말을 듣고 서희에게 지저분하다고 칭얼댔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학교는 아이들로 미어터졌다. 아이들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었지만 그것도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은 거침없이 쌍문동으로 모여들었다.


어느 날 동장이 서희를 찾아왔다. 통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서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저는 나랏일은 안 합니다"

"아니 지수 어머니 나랏일이 아니고 통장을 좀 해달라는 겁니다"

"그게 나랏일 아니에요. 통장이나 반장이나 다 나라 일이지 뭐겠어요"

"그래도 동네에서 한 명뿐인 의사 선생님 댁이고 동네 사람들도 지수 엄마를 잘 따르고 하니 지금 동네가 자꾸 커져가는데 이리저리 일이 좀 많습니다"

"아무튼 저보다는 기름집 동윤네 아버지가 더 적격입니다. 그분이 이문이 밝고 사리가 분명하세요"


서희는 동장이던 통장이던 나라와 관계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중정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무슨 일이든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쌍문동도 문제였다. 쌍문동 일대의 적산 토지가 분배되는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행정이 난무했고, 누군가는 주민들의 입장을 앞장서서 대변해줘야 했다. 서희는 동윤의 아버지를 찾았다.


"동장이 찾아왔는데, 동윤 아버지가 통장을 해 주셨으면 하더군요"

"왜 제가 … "

"지금 이 일대에 적산 토지가 분배되고 있는 것은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나도 이 참에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행정이 말도 못 해요. 이 근처 땅이 죄다 그 대학 소유라"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 "

"동윤 아버지가 동장하고 측량사 옆에 붙어서 장난치는 것을 막아 주세요. 일전에 보니까 연필 굵기가 달라서 땅이 좁아졌다는 황당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지수가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서희는 국민학교 일학년인 지수가 혼자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못내 위험해 보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버스에는 사람들로 항상 가득 찼다. 더 밀어 넣을 수 없을 지경인데도, 어린 처녀들이었던 차장들은 버스 문의 끝에 대롱 대롱 매달려 사람들을 몸으로 밀어 넣고 ‘오라이’를 외쳤다.


그 와중에서도 차장들은 사람들로부터 동전을 받아 복대에 집어넣었다. 복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도 동전으로 가득 찼고 그 무게로 어린 차장의 여린 허리에서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춘자는 종세가 서울역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춘자는 산골 봉화에서 무작정 상경했다. 그것을 가출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집에서는 더 대책이 없었다. 숟가락이라도 하나 덜자는 심정으로 서울서 돈 벌어 동생 학비를 대겠다며 봇짐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서울역에 덩그러니 떨어진 춘자는 직장은커녕 그날 밤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하는 것인지 조차가 가늠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초리 모두가 무서웠다.


"직장 찾아요?"

"날 따라와요. 좋은 직장 소개해 줄테니"


춘자에게 다가선 남자는 겉보기에도 무서웠다. 춘자의 봇짐을 선뜻 손에 쥐고 춘자를 이끌었다. 춘자는 그 자의 손길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아니라요. 저 친척 있음더. 친척을 기다리는 중이라예"


춘자의 곁을 지나던 종세가 깜짝 놀랐다. 부산을 다녀오던 종세는 서울역 광장에서 어떤 처녀의 비명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무작정 상경 한 처녀 같은데 요즘 서울역에서 이런 처녀들을 데려가 사창가에 판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막상 보니 황당했다.

"무슨 일이요?"

"이 아저씨가 지를 데려가려 합니더"


춘자가 종세의 뒤로 숨었다. 그 자는 종세의 눈치를 살폈다. 정갈한 넥타이에 고급 양복을 입고 있는 종세의 품새에 그 자는 기가 눌려 슬금슬금 뒷걸음쳐 달아났다.


"조심해서 다녀요. 아가씨"


종세는 춘자의 봇짐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저기요 선생님!"


춘자가 돌아서는 종세를 불렀다.

"갈 곳이 없어예 ~ 먹고살 곳이 있으면 좀 알려주시소.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더"


춘자를 데리고 들어온 종세를 보고 서희는 입이 벌어져 말을 잊지 못했다. 어디 애를 낳아 온 것은 아니냐며 종세를 몰아 붙였지만, 구석에서 훌쩍이는 춘자를 보고는 물정 없는 종세를 닦달했다.


종세는 스미스까지 들먹이며 서희를 설득했다. 서희는 종세의 입에서 스미스의 이름이 나오자 더 이상은 종세를 닦달하지 못했다. 서희는 춘자를 불러 앉혔다. 집은 어디이며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세세히 물었다. 춘자에게는 사연은 있었으나 대책이 없었다. 서희는 춘자에게 직장부터 잡아보자고 했고 그동안은 집안 일을 하라고 했다.


서희는 동장을 찾아갔다. 춘자의 직장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쌍문동에는 공장도 없어서 춘자가 어디 일할 곳이 마뜩지 않았다. 동장은 우이동 북한산 입구에 버스회사가 계속 생기고 있다며 춘자를 차장으로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춘자는 북한산 입구에 있는 버스회사에 차장으로 취직했다. 그곳은 기숙사도 있어서 춘자는 거기서 숙식하면서 주말이 되면 서희에게 와 자고 갔다.


버스 차장일은 춘자에게 쉽지 않았지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힘듬이었다. 조금만 더 모으면 집에 돈을 부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침 버스에서는 학교 가는 지수를 보기도 했다. 언니라고 부르며 반갑게 버스에 타는 지수가 예뻐서 춘자는 슬그머니 복대에 있는 동전 몇 개를 꺼내 지수의 손에 쥐어 줬다.


"눈깔사탕 사묵으라"


어느 주말 방에 들어간 춘자가 나오지 않았다. 서희가 밥을 먹으라고 해도 춘자는 나오지 않았다. 서희는 방에 들어가 춘자를 돌이켜 세웠는데 춘자가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니?"


춘자는 서희를 붙잡고 엉엉 울면서 회사에서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 폭행했다고 했다. 서희는 춘자의 웃옷을 벗겼다. 온몸이 멍 투성이었다. 당시 버스 차장들은 복대에 있는 돈뭉치를 재주껏 숨겼고 회사는 이를 잡기 위해 공공연히 차장들의 몸에 손을 댔다.


서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길로 춘자의 손을 잡고 회사로 갔다. 춘자에게 손을 댔다는 그 과장인지 뭔 지하는 자를 불러냈다.


"얼마예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춘자가 가져간 돈이 얼마냐 말이에요"

"아직 정산이 되질 않아서 ..."

"정산이고 뭐고 그렇다고 애 몸에 손을 대요. 이거 내가 다 물어줄 테니. 당신은 혼 좀 나봐요"

"내 시숙이 중정에 있는데 당신 그만 안 둬!"


과장은 서희의 입에서 중정이란 말이 나오자 사색이 돼서 서희와 춘자에게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종세는 그런 서희의 말을 듣고 당신이 중정을 그리 이용할 줄은 몰랐다며 혀를 찼다.


다음 날 버스 회사 과장은 퇴직금인지 합의금인지를 알수 없는 돈봉투를 들고 와 서희에게 연신 굽신거렸다. 춘자에게는 왜 서희가 친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이제 어찌할 거니?"

"구로에 있는 공단으로 갈라꼬예. 거기서 여공을 구한다 캅니다. 야학도 있다하니 공부도 해 보겠습니더"

"춘자야! 잘생각했다. 굶어도 공부는 끊지 말아라. 그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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