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문이 열린다. 머리카락은 잘 정돈되어 있고, 말끔한 옷을 입은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나를 반겨준다. 엄마는 내가 들고 있는 책가방과 신발주머니 따위를 받아주고는 손 씻고 와서 간식을 먹으라고 말한다. 집안은 환하고 엄마처럼 정돈되어 있다. 부엌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무언가가 끓고 있다. 손을 씻고 나와 식탁 앞에 앉자 내 앞엔 엄마의 정성이 들어간 간식들이 차려진다. 이를테면 잡채라든가 튀긴 닭이라든가 만두 같은 것들. 나는 간식을 먹으면서 재잘거리며 떠들곤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수업 시간에는 뭘 배웠는지, 친구들과는 뭘 하면서 놀았는지... 받아쓰기를 100점 맞은 일이나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사실은 꼭 빠뜨리지 않았고, 부러 좀 더 강조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간식을 먹은 뒤 출근 준비를 위해 화장을 하는 엄마 옆에 앉아서도 수다는 계속됐다. 그때 나눈 어떤 대화와 장면들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립스틱을 바르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두세 번 맞닿게 하는 엄마를 보고는 “엄마 루주 바르고 나서는 왜 그렇게 음음 하는 거야?”라고 물었던 일이라든가, 화장하던 엄마가 왜 그렇게 빤히 보냐고 물은 뒤 “예뻐서”라는 나의 답에 환히 웃던 엄마의 표정. 그날 집안은 참 포근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던 건 엄마는 일부러 ‘나이트 근무’, 그러니까 밤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하는 그 고된 근무를 자진해서 좀 더 많이 했다고 했다. 남들은 꺼리는 그 근무를 엄마는 더 하려 했던 까닭은 어떻게든 낮 시간에 더 오랜 시간을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내가 좋아했던 이브닝 근무는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기에 엄마는 선호하지 않았다 했다. 나이트 근무에서 돌아온 엄마는 늘 지쳐 안방 침대에서 자고 있곤 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더라도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얼굴에는 베게에 눌린 자국이라든가 마른 침 자국이 남아있는 엄마에게 어떠한 얘기도 맘 편히 재잘댈 수는 없었다.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있을 수 있었지만 소통할 수는 있는 엄마는 부재했던 거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원하던 것과 엄마가 주고 싶었던 게 어긋났던 건.
청소년 시절, 나와 엄마는 참 많이 다투었다. 나는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었지만 엄마는 통제하려 했다. 나는 엄마가 놓아주기를 바랐지만, 엄마는 자신의 틀 안에서 나를 키우는 게 사랑인 줄만 알았었다. 언니는 순응적인 사람이라 그러한 엄마와 궁합이 잘 맞았지만, 나는 언제나 엄마와 다투었다. 다툼 끝에 엄마가 “나중에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라고 하면 나는 지지 않고 “그럼 너무 좋을 것 같은데?”라고 응수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도 나도 지지 않으려는 싸움은 지속되었고 나의 반항심은 극에 달했다. 그럴수록 엄마는 나를 수용해주기보다는 더 좁은 틀로 가두려할 뿐이었고,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와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은 몰랐다.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얼마 동안은 그랬던 엄마를 원망했다. 엄마는 대체 그때 왜 그렇게까지 날 힘들게 했냐고. 나를 그냥 수용해줄 수 없었냐고. 임상심리사가 되어서 가장 많이 들여다보고 치유했던 건, 내담자들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제 뚜렷하게 기억에 각인되어 있는 건 엄마와의 싸웠던 장면이 아니라, 엄마와 도란도란 나누었던 대화들, 그리고 집안까지 깊게 들어오던 하오의 햇살이라는 걸 깨닫는다. 강력한 무언가로 그려진 밑그림은 아무리 그 위에 어두운 물감으로 뒤덮이더라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 밑그림에는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 그런 강하고 오래 지속되는 것들이 있었기에. 삶이 나를 등지는 것 같고, 우울과 무기력에 침잠되는 어떤 날에도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든든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오의 햇살을 닮은 삶에 대한 긍정과 의지, 사람에 대한 신뢰 같은 것들도 엄마가 물려주었다는 걸 나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