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재수 없게도 나는 돈이 있었다.
누군가가 행복하지 않다면 돈이 충분하지 않은 게 아닌지 물어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살면서 돈이 없다고 크게 불행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내 방 한 번 가져본 적 없어도, 반지하에서 살았어도, 집이 침수되었어도, 그저 “그런 거지” 하고 살았다.
결혼 후의 삶도 마찬가지다. 위로 보면 끝도 없이 펼쳐지는 부자의 세계가 있지만, 통계청의 중위소득을 보고 있자면 나는 그렇게 가난한 편이 아니다. 사실 통계청의 중위소득과 평균에 대해 의심이 되지만, 어쨌거나 나는 적당히 먹고살만한 중산층의 영역에 들어간다. 돈이 없을 때나, 조금 더 있을 때나 돈에 대해서는 큰 필요를 못 느끼며 살았던 거 같다. 그런데 엄마의 병으로 인해 나는 돈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돈은 선하고, 돈이 곧 정의다.
엄마는 신경외과 4주 재활의학과 3주로 총 7주간 원주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여동생과 간병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중은 여동생이 간병을 하고 주말은 내가 퇴근 후 간병을 하는 루틴이 생겼다.
7주가 끝나갈 때가 되면 보호자들은 바쁘다. 전원(다른 병원으로 갈아타기)을 알아봐야 하고 갑작스러운 고액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족들과 의논해야 한다. 형편이 넉넉한 가정은 그냥 아무나 일시불 카드결제하고 나면 끝이지만, 월 100만 원 아니 10만 원의 여윳돈도 없는 집안은 산정특례니, 긴급재난의료비니 정부의 지원을 바라거나 그것도 안되면 신용대출을 받아서라도 병원비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도 병원비를 낼 때가 되었고 가족들에게 병원비를 십시일반해야 하는 중대한 사건이 도래했음을 가족 구성원 전원(그래봐야 여동생, 아빠가 끝이다)에게 통보했다. 사실 나는 여동생에게는 기대하지 않았다. 일을 하지 않으니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빠도 돈이 넉넉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꾸준히 일은 하고 있지만, 모아둔 자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작은 돈이라도 내어 나의 무거운 짐을 같이 들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빠는 돈을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아빠에게는 이미 2천만 원의 빚이 있었다. 부족한 수입으로 엄마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생계를 위해 여기저기 돈을 쓰다 보니 빚이 쌓였다는 것이다.
2천만 원은 저소득층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돈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연이율 10% 이상의 고리를 붙이는 특별 대우(?)를 해준다. 매달 가처분 소득이 10만 원도 되지 않는 이들에게 200만 원의 연이자는 재앙이다. 매달의 이자는 남은 숨마저 갉아먹는 기생충과도 같다.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고민한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아빠의 이자 부담을 줄이고 빚을 갚아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도록 돕자. 엄마가 오래전에 나에게 준 200만 원으로 자사주를 매입해서 불어난 2천만 원이 있었다. 이 돈은 엄마의 돈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 돈을 아빠에게 송금하며 말했다.
“아빠, 빨리 이 빚부터 갚으세요.”
그리고 아빠를 안아주었다. 큰 빚을 홀로 감당하며 힘들어했을 아빠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 결정은 아내와의 상의 없이 내린 것이었고, 이는 훗날 아내와의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들은 나의 무거운 짐을 들어줄 한 줌의 여력도 없었다. 그렇다, 병원비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7백만 원을 낼 수 있는 여윳돈이 있었다. 가진 집도 빚도 없으니, 매달의 가처분 소득이 쌓여 자산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다.
우리 집안은 너무 당연하게 재정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생과 아빠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병원비 내역서는 물 흐르듯 나에게 와 있었다. 상황이 재수 없지만 내가 재수가 있다고 해야 할까? 일단 돈이 있는 상황에 감사한 마음으로 병원비를 충당하기로 한다. 아니,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를 미래의 지출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