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늘윤
원시 인류에서 현생 인류까지. 그리고 아이에서 노인까지. 우리는 걸었고, 걷고, 걸어간다. 발 디딘 땅을 박차 날지는 못한다. 다리 개수는 시간과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발바닥은 과거도, 현재도, (기술이 없는 한) 미래도 지표에 붙박인 채다. 이처럼 중력으로 운명지어진 우리는 데카르트적 공간에 익숙하다.
데카르트적 공간이란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받은 공간 개념이다. 자연을 기계적으로 이해한 데카르트는 공간이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하고 정확히 가시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이 인간 중심 철학의 핵심 문장이었다. 인간이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며 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는 가정은, 데카르트적 공간의 인간을 이성적이고 모든 것을 보는 이상적 주체로 바꾸어놓았다. 직교하는 세 개의 축으로 삼차원의 공간을 나타내는 데카르트적 격자가 그렇다. 좌표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점이 인간이니, 관찰되는 자연보다 바라보는 인간이 높아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데카르트적 공간은 인류사에서 주된 인지적 틀을 구성해왔다. 원점을 쥔 인간이 방대한 자연을 나름의 질서로 보기 좋게 가꿔가는 것. 덕분에 우리는 와글대던 삼라만상을 종, 속, 과, 목이라는 격자에 넣어 쉽게 소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인간이 이룩한 질서에 딴지(?)를 거는 책이 있다. 바로, 의미심장한 연분홍빛 제목이 인상적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2021)』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명한 어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저자의 추적 스릴러이자 회고록이다. 밀러의 여정은, 유일한 지배자인 ‘혼돈’에게 ‘나’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아버지의 오랜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된다. ‘혼돈’이라는 과학적 사실에서 벗어나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었던 밀러는 조던에게 매료된다. 조던은 혼돈에 굴하지 않고 자연계에 끝없이 이름을 붙이며 질서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룰루의 애정 어린 추적은 롤모델의 부정(不正)으로 끝맺어진다. 스릴러의 반전처럼, 조던이 미국 내 합법적 불임 시술을 이끈 우생학자이자 성공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임이 밝혀진 것이다. 롤모델을 잃은 밀러는 이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과학적 사실을 통해 인류사가 오래도록 조던처럼 인간/비인간 모두를 ‘직관’으로 재단해왔음을 깨닫는다. 동시에 다윈의 가르침으로 공존의 중요성을 깨치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저자의 서술처럼 다윈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이 아닌 공존의 가치를 역설했다. 적자생존은 ‘자원의 제약하에서 꾸준한 협력과 강력한 상호작용으로 서로 공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것을 뜻했고, 약육강식은 사용된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다윈의 가르침은 조던이 열광한 우생학으로 변모하여 현대인의 ‘능력주의’ 신화로 안착했다.
이렇게 격자의 중심인 인간사회조차 우생학적 사고로 혼란한데, 피사체인 비인간의 삶은 얼마나 척박할까. 인간예외주의와 개체주의에 익숙한 데카르트들은 자연을 재단하고 ‘거세’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자연의 지적 능력을 배제해온 오랜 역사와 달리, 식물은 화학물질로 대화하고 고래에겐 사투리까지 있다는 과학적 사실이 하나둘 밝혀지고 있다.
밀러는 잘 짜인 격자 속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설득해온다. 표지그림 속 미소짓는 인어는 그의 제언을 함축하고 있다. ‘직관’에서 벗어난다면 ‘물고기’로도 ‘인간’으로도 구분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인어처럼 발 없이 자유로이 세상을 누빌 수 있노라고 말이다. 데카르트적 공간이 주는 안온함에서 벗어나, 혼돈 속에서 씩씩하게 나아갈 모든 이에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