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애가 한 살, 큰애가 두 살이 될 때까지 방 두 개에 화장실이 하나인 아파트에서 시부모님 포함 여섯 명이 같이 살았다. 3층짜리 목조건물인 아파트 중간층인 2층에서 사는 동안 층간소음과 벽간 소음으로 스트레스가 엄청 컸다. 아이가 종일 보행기를 타는 것도 아닌데 아래층 할아버지는 시끄럽다며 빗자루로 천정을 치면서 신호를 보냈고, 윗 층의 뚱뚱한 부부가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거기다 한 밤중까지 TV를 영화관처럼 보는 시아버님으로 인해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최소 방이 3개가 있는 내 집 마련이 절실했다. 미국에 온 지 4년 만인 1990년에 마련한 첫 집은 초등학교, 중학교 학군이 좋아 더 마음에 들었다. 그때 주택 모기지 이자율이 13% 였지만 층간소음, 벽간 소음에서 벗어나고 좋은 학교에 보낸다는 생각에 높은 이자율도, 허리띠를 졸라맸어도 즐거웠다.
명문대 입학률이 높은 고등학교가 있는 곳으로 이사 간 2001년의 모기지 이자율은 10%가 넘었다. 학군이 좋다 보니 집값이 비싸 대출금도 많이 얻었다. 두 번째 집은 아이들이 피아노와 드럼을 시간대에 상관없이 연주하기 위한 개인주택이었다. 좋은 공립은 괜찮은 사립학교와 비슷해서 조금 부담이 되었지만 아이들을 위해선 당연한 결정이었다. 부동산 붐이 한창이었던 2005년에 두 번째 집을 팔고 새집으로 옮겼으며 이 시기에 부동산 라이선스를 취득해 리얼터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14년을 이 집에서 사는 동안 아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었기에 학군보다 이젠 나의 노후를 위한 집으로 이사 왔다. 조그마한 뒷마당이 있는 이곳에 2019년 겨울에 이사 온 것은 오로지 나의 노후를 위한 선택이었다.
미국에도 학군이 좋은 곳에 사람이 몰리고 그로 인해 집값도 다른 곳 보다 높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되어 클릭만 하면 학교정보를 알 수 있지만, 그때는 매년 1월쯤 지역 신문에 학년별 공립학교의 평점이 실렸다. 그것을 10년 정도 스크랩을 했기에 이사 가는 방향을 쉽게 정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린 자녀를 둔 고객들은 나처럼 좋은 학군을, 좋은 평점을 많이 따진다. 얼마 전 손님과 주택상담을 하는데 학군만 좋다면 직장에서 2시간이 걸려도 이사 가고 싶다는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부모의 마음이 느껴졌고 내가 몇 번의 이사 다녔던 일들도 떠올랐다.
맹모삼천지교는 아이들의 교육환경을 위해 부모가 이사를 다닌다는 말이지만 노후세대는 병원과 슈퍼마켓 그리고 교통이 편한 곳이어야 한다. 자녀의 학군을 위해 3번의 이사를 갔듯, 이젠 나의 노후를 위해 이사를 해야 될 나이가 되었다. 몸이 둔해질 미래의 나만의 두 번째의 집은 지금 사는 집보다는 작을 것이며 언제인지 모를 마지막 집은 한 뼘도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이사를 다니면서 느꼈던 기쁨과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있다는 감사함이 더 크다. 가족이 살아가는 집은 위안이고 사랑이면서 또한 세월인 것이다. 그 세월 속에서 가족의 생로병사를 품은 집은 참으로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