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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효원 Nov 25. 2024

파란 배추씨의 여정

[김효원의 어쩌다 농부]

파란색 배추씨가 있다는 걸 지난여름 처음 알았다. 배추씨는 원래 밤색인데 병충해에 강하게 하기 위해, 종묘 회사가 약품으로 코팅해 파란색이 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봉투를 뜯자 파란색 씨앗이 쏟아져 나왔을 때 나는 탄성을 질렀다. 마치 푸른 우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파란색이 코팅된 배추 씨앗. 사진=김효원

8월 15일 광복절 주간에 여름휴가를 내고 시골집에 갔다. 기억하기 좋으라고 광복절을 골라, 파란색 배추씨를 모종판에 심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자 사흘 만에 새싹이 올라왔다. 파란 배추씨에서 나온 새싹은 연두색 나비 같았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면 새싹이 나온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기한지, 나비를 닮은 배추 새싹은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봐도 또 들여다보고 싶을 만큼 예뻤다.

막 발아한 배추씨는 나비같은 모양이다. 사진=김효원

일주일의 여름휴가가 끝나고 배추모종판을 자동차에 싣고 서울에 가져와 베란다에서 2주를 키웠다. 새싹이 검지 손가락만큼 자란 8월 31일, 모종을 가져다 텃밭에 정식했다. 정식한 배추 모종은 잎이 고작 서너 개뿐인 보잘것없는 모양새라 이게 과연 사람 꼴, 아니 배추 꼴이 될까 의심이 났다.

2주 정도 키운 배추 모종. 검지 손가락 크기 정도로 자랐고 떡잎 위에 새 잎이 3~4개 정도 나왔다. 사진=김효원

배추를 심은 후에는 그야말로 물가에 어린애를 내놓은 심정이었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여름 날씨에 배추는 심자마자 시들시들 고개를 숙였다. 물을 듬뿍 주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풀을 뜯어다 배추를 덮어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종이컵을 씌워주어도 된다고 하는데, 배추가 숨을 못 쉬면 어쩌지, 광합성을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돼 종이컵은 씌우지 않았다.

배추를 심고 일주일 후 비료를 주었다. 날이 더워 시들시들한 배추가 걱정돼 풀을 뽑아 이불을 덮어주기도 했다. 사진=김효원

배추를 심은 지 일주일 후인 9월 7일 첫 비료를 주고 농약을 쳤다. 배추는 유난히 벌레가 잘 먹는 채소라서 농약을 치지 않으면 배추가 남아나지 않는다. 벌레가 배추의 성장점을 톡 끊어먹으면 배추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배추가 벌레를 이길 만큼 자랄 때까지 부지런히 농약을 쳐야 한다. 종묘상에서 권해준 배추벌레퇴치약을 500분의 1로 희석해 줬다. 말이 500분의 1이지 사실상은 대충이다. 무슨 수로 500분의 1을 정확히 계량할지 방법을 찾지 못해 대충 페트병에 물을 넣고 희석해 다이소에서 산 1000원짜리 스프레이통에 넣어 뿌렸다.  

농약을 조금이라도 덜 치겠다는 의지로 커피찌꺼기를 적극 활용했다. 서울의 단골 커피집에서 커피찌꺼기를 얻어다 집에서 잘 말린 다음 시골로 가져다 배추 주위에 뿌렸다. 서울 집에서 커피찌꺼기를 말려보니 배추벌레가 왜 커피찌꺼기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커피찌꺼기에서 하도 독한 냄새가 나서 거실에 앉아 TV를 보기가 어려웠다.

커피 찌꺼기를 잘 건조시켰다가 배추 주위에 뿌려주었다. 사진=김효원

처음에 잘 안크는 것 같아 보였던 배추들이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한 것은 비료를 주고 난 후 비가 흠뻑 내린 다음부터였다. 땅에 스며든 비에 비료가 잘 녹아 배추가 잘 섭취한 까닭일 테다. 땅에 심은지 2주 정도가 지나니 잎이 8장으로 늘어났고 크기도 손바닥 두 개 합한 크기로 자랐다.

배춧잎이 꽃잎처럼 예쁘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배추는 마치 꽃처럼 한 장 한 장 잎을 펼쳐가며 자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이 꽃이었다.

이파리를 늘려가며 성장하는 배추. 사진=김효원

배추는 서늘한 기온을 좋아한다. 더우면 기운을 못 차린다. 더위가 물러가고 기온이 조금 내려가자 배추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10월에 접어들면서 배추는 포기를 만들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가운데 잎이 오므라들기 시작할 때 배추벌레약을 쳐야 한다. 포기가 앉을 때 배추벌레가 들어가면 배추 속을 파먹기 때문에 배추농사를 망치게 된다.

활짝 핀 꽃처럼 잎을 펼친 배추. 사진=김효원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물을 듬뿍 자주 줘야 하는데, 물이 과하면 또 과습으로 뿌리가 썩는 무름병이 생기니 만만하지 않은 녀석이다.

10월 한 달은 포기를 만든 배추가 몸집을 키워간 시기였다. 11월에 접어들며 기온이 더 내려가자 이제 살겠다는 듯 부쩍부쩍 몸집을 키웠다. 그 결과 한 포기에 3kg은 기본이고 5kg을 넘긴 배추가 탄생했다.

끈으로 묶어주지 않아도 배추가 스스로 오므라 들면서 포기를 만든다. 사진=김효원

올여름 유독 날씨가 더워 동네에서도 배추 농사를 망친 집이 여럿이었다. 옆옆집 할머니네는 배추 뿌리가 썩어 들어가 다 크기도 전에 일찌감치 뽑아 김치를 담갔다고 했다. 우리 집 배추는 동네에서 잘 됐다는 소문이 났다고 해 마음이 웅장해졌다. 그 작고 연약했던 새싹이 묵직한 배추가 되다니. 신이시여 정녕 이 배추를 제가 키운 게 맞습니까?라고 물어봤지만 신은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배추를 왼손으로 밀면서 오른손으로 밑동에 칼을 가져다 대면 뿌리를 쉽게 자를 수 있다. 사진=김효원
벌레 먹은 데 없이 속이 꽉 차 묵직한 배추. 약 40포기를 수확했다. 사진=김효원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배추를 93일 만에 수확해 지난 11월 16일 김장을 했다. 김장날은 추워서 손을 호호 불어야 정상이지만, 이날은 마치 봄날처럼 포근했다. 배추를 나르다 더워서 점퍼를 벗어야 할 정도였다.

날씨의 조화와 싸우며 키워낸 배추를 잘 수확해 김장을 담은 날, 깨알만큼 작아 무게를 잴 수 없었던 배추씨 한 알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성취감을 만끽했다. 눈 내리는 겨울밤, 잘 익은 김치를 꺼내 막걸리를 마시며 농한기의 행복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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