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구석 하나쯤은 남겨두자
1장 마인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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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과 위기는 불시에,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때 나를 지켜줄 '최후의 보루' 하나쯤은 미리 마련해 두는 게 좋다. 그게 돈이든, 사람이든, 아니면 둘 다이든.
"작가님, 프리랜서로 일하려면 통장 잔고가 최소 2,000만 원쯤은 돼야 한다면서요?"
지난해 처음 함께 일하게 된 회사의 팀장님(기획·편집자)이 저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아마 직장을 그만둔 후 프리랜서로 전직하는 걸 염두에 두고 하신 질문인 듯해요. 뭐, 질문에서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프리랜서(고스트라이터)는 아주 불안한 직종입니다. 일 의뢰가 끊기면 경제 활동 자체가 어려워지거든요. 그러니 새로운 일 의뢰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은 중요합니다. 통장 잔고는 당연히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죠.
그러나 일 의뢰가 언제 올지, 얼마나 올지, 알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상황에서 통장 잔고를 2,000만 원 이상 쌓아두는 프리랜서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내 집 마련을 위해, 혹은 집 대출금 상환을 위해 모아둔 돈이 2,000만 원일 수는 있어도, 일이 없을 경우에 대비해 입출금 통장에 상시 2,000만 원을 넣어두는 프리랜서는 아마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2,000만 원이라뇨. 500만 원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죠.
하지만 제가 아무리 일 의뢰가 없어 불안하고 초조해도 섣불리 다른 직종으로의 전직이나 취업을 고려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거든요.^^ 첫 번째 믿을 구석은 바로 마이너스 통장입니다. 저는 한도 1,000만 원의 '마통'을 10년 넘게 보유하고 있어요. 매달 나갈 돈은 정해져 있는 데 반해, 들어오는 돈은 둘쭉날쭉하거든요. 입금되는 돈이 아예 없는 달도 있고, 또 어떤 달은 1,000만 원이 넘을 때도 있습니다. 일의 종류에 따라 원고료 결제 방식이 달라서 생기는 현상이에요. 계약금/중도금/잔금 이런 식으로 원고료를 주는 프로젝트도 있지만, 대부분은 일이 끝난 후에야 원고료를 입금해 주거든요. 지급 시기도 다 다릅니다. 어떤 곳은 일 끝나는 달에 바로, 또 어떤 곳은 일 끝나고 한 달이나 두 달 후에 주기 때문에, 수입과 지출을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이너스 통장은 이를 효과적으로 커버해 주는 역할을 해요. 다소 수입이 부족한 달에도 카드 결제를 못해 신용도가 하락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는 최고의 보완책인 거죠. 담보대출에 비해 이율은 다소 높지만 빌려 쓴 금액만큼 이율이 적용되고, 거래 실적과 신용도에 따라 대출금리를 낮춰주기도 하니, 가지고 있어서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마이너스가 커질수록 경각심을 갖고 '일은 늘리고 소비는 줄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는 장점도 있고요.
두 번째 믿을 구석은 월급쟁이 남편입니다. 남편이 저보다 4살이나 많은 터라 앞으로 얼마나 더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당장은 제가 일이 없다고 해도 생계 자체가 불안해질 일은 없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남편은 제 믿을 구석인 동시에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남편만 믿고 사는 건 아니에요. 전 경제 활동을 시작한 후부터 한 번도 온전히 쉰 적이 없을 만큼 돈 버는 일에 진심이거든요(경제적 독립이 인간의 자존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믿는 타입이라서요). 심지어 임신 기간에도 꾸준히 일을 했을 정도예요. 첫째 땐 직장에 다니는 중이었고, 둘째 땐 출산 직전까지 프리랜서로 일했답니다.
거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요. 저희 부부는 25년 결혼 생활 동안 통장을 합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제 또래 부부 중에는 아주 드문 케이스라고 하더라고요. 저희는 각자 벌어서 각자 쓰되 중요한 항목의 비용을 나눠 부담하는 구조로 함께해 왔답니다. 이를테면 집 대출금/관리비/각종 세금/자동차 관련 비용/시어머니 용돈/외식비/기타 비용 등은 남편이, 아이들 교육비와 용돈/아이들과 제 보험료/친정어머니 용돈/시어머니댁 각종 세금/식재료비 등은 제가 책임지는 식으로요. 남편의 부담도 상당하지만, 제 부담 역시 남편 못지않은 셈이죠.
직장을 그만두고 고스트라이터(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가능한 한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내 몫의 비용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고(남한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서요. 엄밀한 의미에서 남편이 남은 아니지만요), '내가 많이 벌어야 남편의 부담이 줄어서 저축 액수나 자산 증식 폭이 커진다'라고 믿었거든요(저희 집은 남편이 자산 관리를 해요. 제가 재테크엔 관심도 없고 역량도 부족해서요ㅠ.ㅠ). 다행인 건 서로가 서로를 잘 보완하면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아왔다는 겁니다. 뭐, 서로에 대한 믿음도 컸을 테고요.
올해 일이 줄어든 후, 제 안의 불안이 커지고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나가야 할 돈은 많은데 수입이 없으니 남편한테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요. 물론 남편은 잔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제게 필요한 돈을 내주었답니다. 그동안 제 덕분에 여윳돈을 꽤 많이 모을 수 있었다면서요. 하지만 제 마음은 편치 않았어요. 남편에게 지나친 부담을 지우는 것도 싫고, 제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기분이라서요.
그런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남편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라는 생각도 해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때 팀장님의 질문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2,000만 원? 있으면 좋죠. 근데 저는 남편이 있어서 괜찮아요."
제 말은 '일이 없어도 남편이 있어 생계유지는 되니 굳이 2,000만 원이 통장에 있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지만, 그 팀장님은 '역시 여자들은 가장의 무게를 모르는구나'라고 오해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남자 팀장님이셨거든요). 그때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고스트라이터(프리랜서)는 분명 불안한 직업이고, 경제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를 대비하는 건 필요하다. 그러나 그 대비책이 돈인지,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를 지탱해 줄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돈이든, '마통'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친구든, 부모님이든, 그게 뭐 중요하겠어요?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지지해 주고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어줄 최후의 보루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러니 저처럼 수입이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직종에서 일하고 계시다면, 부디 믿을 구석 하나쯤은 마련해 두시길요. 그래야 지나친 걱정과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