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못생긴 여자와 그녀를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

by 이아
1. 라스 메니나스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그해의 첫눈이 내린 날이었고, 열아홉 살이던 내가… 정확히 스무 살이 되던 날이었다. 길고 쓸쓸히 이어진 빈 논과 드문, 드문 서 있던 나무들… 창밖의 어둠과, 덜컹이며 교외를 달리던 버스가 생각난다. 아무리 달려도 아무도 서 있을 것 같지 않은 풍경이었다. 있을…까? 그, 팔이 부러진 허수아비 같은 표지판과 작은 정류장이 보일 때까지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모니카로 부는 올드 랭 사인이 잡음이 심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있을…거라고 서늘한 창에 이마를 기댄 채 나는 생각했다. 어스름도 사라지고… 줄곧 따라붙던 밤이 버스를 저만치 앞질러 간 느낌이었다. 지나쳐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그 정류장을, 십여 미터쯤 지난 후에야 버스는 멈춰 섰다. 기울어진 표지판의 그림자가 끝난 곳에서 그녀는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미처 발을 내리기 전에 버스가 출발했으므로, 잠시 균형을 잡으며 땅이 움직인 듯한 기분에 휩싸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지구는 돌고 있었고 올 거야, 있을 거야 –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궤도를 순항하던 그날의 달처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올 줄 몰랐어요.
하지만… 기다렸잖아.

그런 말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소리를 서로가 속삭인 기분이었다. 내면의 귀가 듣는 내면의 소리처럼 그때의 어둠 속에도 보이지 않는 달의, 달빛이 스며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인사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체온을 빼앗긴 그녀의 손과… 빠르게 들판을 가로질러 사라지던 길고 긴 기차의 불빛이 생각난다. 우리는 한동안 그 불빛을 응시했고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눈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녀의 얼굴에서 입김이 피어올랐다. 주변의 어둠 때문에 그것은 선명했고, 주위의 고요 때문에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사람들처럼 표정 없고 쓸쓸한 초설이었다.


From.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박민규 작가님이 쓰신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읽어보셨을까요? 이 소설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제 맘에 남아있을까요? 이 소설도 저의 인생 소설입니다. 연애 소설을 그닥 선호하진 않지만, 이 소설만은 희한하게 공감이 많이 되고, 여운도 짙게 남아있네요.


위의 인용구는 소설의 도입부인데, 또 희한하게도 제 맘을 사로잡네요. '다 외워버리고 싶다!' 는 마음으로 타자를 쳐서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도 쓰고 싶다아~, 그래서 도전했었네요. 그 첫 마음을 또 떠올리며 끄적입니다.


올 줄 몰랐어요.

하지만… 기다렸잖아.

이 짧은 대화(결국 입 밖으로도 나오지 못한)가 저의 맘을 울렸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달의, 달빛이 스며들어있다니..

어둠과 달과 달빛

흐릿하지만 묘하게 저를 이끄는 문장이었습니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사람들처럼 표정 없고 쓸쓸한 초설

에서도 마음이 동했습니다.


이 소설은 매우 흥미로운 줄거리, 못생긴 여자와 그녀를 사랑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로 제작될 줄 알았는데 여러 차례 엎어졌나 봅니다. 이 소설을 구입하면 BGM CD가 제공되는데 소설에 대한 헌정음반이라고 합니다. 머쉬룸 밴드의 음악인데 이 음악을 들으면서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음악과 문학이 만날 수 있구나! 딱 내 스탈인데,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겨울이고 많이 춥다보니 또 이 소설의 도입부인 라스메니나스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라스 메니나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