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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각커피 Sep 10. 2021

그럼에도 일러스트레이터로 살고 싶다.

20대 중반, 여러 회사를 전전하다 마지막 퇴사를 한 후 내 방 책상 앞에 앉아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다.

하루에 열 시간 넘게 포토샵으로 이것저것 건드리며 재미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 순간 포토샵 기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콘셉트를 구상하고, 포토샵 툴과 효과 기능을 사용해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머리 끝 세포까지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보기 시작했다. 올리다 보니 어느 플랫폼에서 주최한 공모전에 당선되고, 전시와 외주 제안이 오면서 '그림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꿈이 생겨났다. 매체에 소개되는 '스타 일러스트레이터'만 보며 막연히 나도 그런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서 밥벌이를 하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동안 진행한 포트폴리오만 모아 보면 아예 수입이 없는 작가는 아닌 듯 보이지만, 그림으로 받는 수입을 따져보면 최저 시급도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본 지식 백과에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보니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일이 없으면 거의 백수나 마찬가지다.'


나는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해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내 스타일대로 그림을 올리고 의뢰가 들어오면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벌면 된다는 라는 생각으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열심히 그렸다. 그런데 그림을 그릴수록, 그림으로 돈을 벌고 싶을수록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커져만 갔다.



나의 일이 상업적인 효과를 가지려면 '자신을 표현하는 창조 활동'과 '다른 사람을 위한 결과물 제공'이라는 두 행위가 상충하지 않고 어우러져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빨간 그림'을 좋아해 '빨간색 그림'을 그린다고 해보자. 내 '빨간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상업적 가치까지 있어서 수입이 꾸준히 생기면 베스트지만, 세상 사람들이 '파란색 그림'을 좋아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고 잘 그리는 건 '빨간 그림'인데 세상은 '파란 그림'이 더 잘 팔리고 '파란 그림을 그리는 작가'에게 열광한다면?  '빨간 그림'이 정체성이었던 내가 바로 '파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원래 '파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거나 '파란 그림의 시대'에 자란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고 '파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그림의 유행과 흐름의 변화를 맞닥뜨리고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과 다른 사람이 원하는 그림에서 오는 선택의 갈림길 말이다. 유연하게 시대의 흐름이나 유행에 따라 스타일을 바꾸지 못하거나, 내 스타일을 좋아해 주는 지지층이 확실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스타일과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심해진다. (그게 바로 접니다. 여러분.)


포폴 사이트를 보면 클라이언트 요청에 따라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잘 변형시켜 그리는 작가들이 정말 많다. 

'그림의 상업적 사용'에 이해가 높고 여러 스타일에도 유연하게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자들이다. 그림을 막 시작한 내가 이런 사람들과 경쟁을 하려니 제대로 된 일보다 어딘가 이상한 일이 더 많이 들어왔었다. 한 번은 내 스타일이 아닌 다른 작가의 스타일대로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 었는데 돈이 없어 급한 마음에 작업에 동의했다가 현타를 크게 받았다. 분명 그림으로 돈을 벌었는데 즐겁지 않았다. 당시 심적으로 정말 힘들었고 그 뒤로는 그런 일은 받지 않으며 의뢰가 들어왔던 사이트도 결국은 탈퇴했다.


요즘은 자신의 스타일을 스스로 리스펙트 하면서 수익을 내고 있는 적극적인 작가들이 많다. 덩달아 나도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다. 가만히 일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 안 된다. 내 그림 자체로도 수입이 날 수 있는 통로를 여러 군데 만들어 보고 새로운 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전부터 굿즈 판매를 해왔던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를 꾸준히 운영 중이고, 유사한 외국 판매 사이트도 오픈했다. 개념만 이해하고 있는 'nft'도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고 있다.


2020년 방영된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엄청난 인기를 끌진 않았지만 나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과몰입하며 본 드라마다. 주인공 채송아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 4수까지 해서 음대에 들어가고, 입학하고 나서도 갖은 노력을 다하는 채송아를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무명가수가 이름을 가리고 나오는 오디션과 댄서들이 나오는 서바이벌 프로그램만 봐도 나와는 상황이 다르지만, 그들의 꿈과 목표, 열망에 깊이 공감된다. 부디 그들이 떨어지지 않길 간절한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몰입하는 건, 그들처럼 나도 내가 겪고 있는 시련을 이겨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에 관심 있는 분들께 상담을 여러 번 해줬다. 솔직히 내 경험만으로는 직업의 전망을 확답할 수 없다. 희망적인 말로 응원하고 싶다가도 어쩔 수 없이 걱정 어린 말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고 있는 건, 내 인생에서 그림을 대체할 무언가가 없을 정도로 정말 그림 그리는 게 좋고 즐겁기 때문이다. 인생을 걸어볼 만큼 좋아하는 게 내 인생에 있으니 미리 겁내지 않으려 한다. 아직 나는 젊고,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게 많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꿈으로 이뤄내는 성공을 바라지, 성공을 위한 꿈을 꾸지 않는다. 각박한 현실에도 꿈을 좇는 모든 이들이여, 우리 모두 힘냅시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느낀 개인 의견입니다. 상황과 의견은 사람마다, 일러스트레이션 장르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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