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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20. 2022

내겐 가깝고도 먼 운동

성인 이후의 운동 

IMF가 터졌다. 아빠는 실직하셨고 우리는 더 좁은 집으로 이사했다. 당시 나는 재수생이었다. 안 그래도 힘드신 엄마, 아빠에게 더 짐을 지워드린 것 같아 죄송했다. 최대한 열심히 공부하고 걱정시켜드리지 않아야지. 하고 다짐했다.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구립도서관에 다녔다. 도서관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워크맨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걸어갔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그렇게 걸어서 다니던 많은 날 중 하루, 신해철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사람 없는 거리와 음악, 살짝 나는 땀, 이 세 박자가 내 기분을 한껏 들뜨게 해 줘 ‘콘서트에 가는 것보다 이렇게 음악 듣는 게 훨씬 좋은데!’하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는 도서관 문을 열며 씩 웃었다. 그땐 음악만 있으면 먼 거리도 지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걷거나 뛰거나. 그때 알았다. 걷거나 뛰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      



걷는 건, 뛰는 건 얼마나 좋은지. 팔과 다리를 열심히 움직일 때의 느낌이 좋다. 팔과 다리를 앞뒤로 휙휙 움직이며 달리면 머릿속 가득했던 걱정과 고민이 내 손끝, 발끝에서 떨어져 날아간다. 머리 한쪽이 지끈거릴 때, 슬픔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찰랑거릴 때 내 몸은 나에게 말한다. “달려, 달려!”


     

특히 슬플 때 달리면서 기도를 하면 내 기도가 바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다. 내 슬픔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고 내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 신 앞에 배달된다. 슬플 때 가만히 있으면 슬픔이 나를 냠냠 먹어 나는 없어지고 커다란 슬픔만 덩그러니 남는다. 슬플 때 달리면 슬픔 이외의 다른 감정이 솟아날 자리가 생긴다. 숨이 가빠지고 땀이 나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지가 생기고 갑자기 웃음이 나기도 한다. 슬픔이 견딜 만 해진다.      



얼마나 걸었던지 걷기만 했는데 1년이 지난 뒤에 5킬로그램이 빠졌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걷거나 뛰는 건 몸치여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운동을 배우려면 여지없이 그 노므 운동신경이 걸림돌이 됐다. 대학교 신입생이 되니 포켓볼이나 볼링을 칠 일이 많았다. 남녀가 함께 할 스포츠가 많지 않다 보니 포켓볼을 치러 많이 갔는데 보통 선배들은 신입생에게 친절하기 때문에 잘 치지 못해도 괜찮았다. 

“선배, 저 포켓볼 못 치는데요.”라고 말하면, 열이면 열 모두 “아, 괜찮아. 우리가 다 알려줄게.”라고 했다. 그러나 당연히 처음 몇 번 만이다. 내가 항상 배운 적이 없던 사람처럼 알려달라고 하니 선배 중 한 명이 언제까지 널 가르쳐야 하냐며 짜증을 냈다. 난 그렇게 가끔 쳐서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볼링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는 포켓볼이 아니라 볼링을 치러 갔는데 갈 때마다 배워도 실력이 늘질 않았다. 더욱이 볼링은 같은 레인에 있는 사람끼리 점수가 합산돼서 스크린에 딱! 뜨기 때문에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내 순서가 되면 가장 가벼운 볼링공을 손가락에 끼우고 천천히 걸으며 뒤로 뻗은 손을 앞으로 내밀어 공을 떨어뜨린다. 터덩텅. 십중팔구 공은 도랑에 빠진다. 

“야, 너 지금 쓰레기봉투 버리는 거냐!”

친구의 말에 나도 민망해 웃음이 났다. 으흐흐흐. 선배들은 날 뒤로 불러 볼링 치는 방법을 알려줬다. 볼링공을 이렇게 잡고 이렇게 앞으로 걸어가다가 정면을 주시하고 볼링공을 떨어뜨리는 거야. 알겠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순서가 되면 분명 배운 대로 한 것 같은데 뒤에선 어김없이 “아..”하는 탄식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선배들은 “괜찮아, 괜찮아.”라고 위로해줬지만 나중엔 점점 말이 없어졌다. 게다가 볼링 비용이나 식사 비용이 걸린 내기를 할 땐 같은 팀에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볼링 치러 간다고 하면 알아서 빠지게 됐다. 사실 그전에 세상 착하기로 유명한 교회 오빠에게 “너 다시는 볼링 치러 오지 마라.”하는 뼈 있는 농담을 들었다. 내 몸이지만 내 맘대로 안 되는 몸을 가진 기분을 그들은 알까. 아무리 친절히 알려줘도 어떻게 하라는지 잘 모르겠다고요. 포켓볼도 볼링도 안녕. 내 인생에 너희들 자리는 없어.      



중고등학교 때 달리기를 그렇게 싫어했던 내가 달리는 걸 좋아하게 된 건 혼자 달리면 서다. 날 보고 깔깔 웃는 아이들도 없고 이겨야 할 상대도 없었을 때. 달릴 때의 여러 감각을 온전히 느끼면서 달리기가 좋아졌다. 달릴 때의 바람, 날씨나 계절에 따라 다른 냄새,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몸의 움직임. 포켓볼과 볼링은 내 인생에서 사라졌지만 이 세상엔 아직도 엄청나게 많은 운동이 있다. 신기하게도 난 새로운 운동에 도전할 때마다 꼭 내가 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새로운 세상이 또 하나 열릴 것만 같다.      



회사 다닐 때 퇴근 후 했던 요가는 선생님이 하시는 동작을 따라 할 수가 없어 한 달만에 그만두었다. 요가를 하기에 내 몸은 너무 뻣뻣했고 호흡도 잘되지 않았다. 다들 바닥에 상체를 붙이고 있을 때 나 혼자 우뚝 솟아있었다. 무한도전을 보고 찾아간 스포츠 댄스 학원에서는 자꾸 동작을 틀려 파트너에게 미안해 그만두었다. 스케이트 타는 폼을 제대로 알려주겠다던 소개팅남은 어느새 연락두절. (그나마 난 스케이트는 조금 탄다고 생각했었는데도) 살을 빼고 근육을 키우기 위해 시작한 헬스도 재미가 없어 한 달만에 스톱. 모든 건 한 달 또는 한 번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직장 생활을 한 이후로는 너무 바빠 꾸준히 운동할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날 때, 스트레스가 쌓일 때 잠깐 뛰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살을 빼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주로 하는 얘기는 다이어트나 운동 이야기였다. 살을 빼야 하는데, 체력이 없는데, 운동해야 하는데. 그러나 말은 그저 뱉을 뿐이고 그 뱉은 말을 실천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다른 일이다.      



게다가 육아까지 하면서 시간을 내서 운동한다는 것은 현실 불가능한 일 같았다. 운동이란 팔자 좋은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한 동료가 점심시간에 같이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 점심시간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지! 일주일에 두 번, 동료와 함께 회사 근처에서 커브스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유산소와 근력운동을 번갈아 하는 여성 순환운동인데 30분만 해도 땀이 뻘뻘 났다. 그러나 과욕이 앞선 탓인지 운동을 하고 오면 팔이 저리고 피곤해 계속 손으로 팔을 주무르며 일을 했다.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몸이 좋아지긴 커녕 더 허해지는 것 같아 결국 또 한 달만에 그만두었다.    


  

이제는 기초 체력마저 없어졌다. 퇴근 후 딸과 함께 공원을 달리는 게 유일한 운동이 됐다. 그러나 이걸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운동보다 더 에너지가 쓰이지만 체력 향상에는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게 분명한 뜀뛰기와 잡기 놀이 그 중간 어딘가의 운동(움직임?). 아. 운동다운 운동은 언제쯤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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