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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Oct 19. 2022

사춘기 때의 운동

사춘기가 되면 보통의 여학생들은 운동과 멀어진다. 우선, 가슴이 나오면 뛰는 게 불편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런 얘기를 일기에 쓴 적이 있다. 달릴 때마다 가슴이 흔들려 불편하다, 같이 뛰는 남학생들이 놀린다, 뭐 이런 얘기. 이 내용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4학년 때 선생님이 일기장 검사를 하다 놀라 나를 앞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마구 떠들고 있었다)

“정말 이렇다고?”

“네.”

“선생님이 한번 만져볼게.”

선생님은-할머니 선생님이었다-내 가슴을 쓱 만져보더니 ‘별로 안 나왔네.’하고 혼잣말을 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난 선생님의 그 반응이 더 놀라웠다. 이게 별로 안 나온 거라고? 이렇게 불편한데? 그럼 얼마나 더 나오는 거지? 나에게는 그 조금의 변화가 아주 컸고 뛸 때마다 불편해서 최대한 천천히 뛰었다.   


   

게다가 생리를 시작하면 몸을 움직이기가 싫다. 생리통이라는 생전 처음 겪는 배앓이가 시작된다. 창자를 걸레 짜듯 비트는 것 같고 배 아래가 묵직하다. 한 달에 이틀 정도는 주기적으로 이렇게 아프고 일주일 정도는 움직일 때마다 생리가 나오는 좋지 않은 느낌(꼭 굴을 낳는 것 같은)을 경험해야 한다. 많이 움직일수록 생리가 더 나오니 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      



나도 2차 성징을 겪으며 운동과 멀어졌다. 피구도 하고 놀이터에서 잡기 놀이도 좋아했는데 6학년 후반에 들어서는 뛰어놀기보다는 놀이터에서 노는 남학생들을 보며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많다.      



그렇게 중학생이 됐다. 내가 간 중학교는 남녀공학이긴 했지만 남녀 합반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때는 특별히 인기가 있거나 주목을 받는 아이가 없었는데 중학생이 되자 예쁘고 날씬한 여학생들이 남학생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난 질투가 나서 ‘쟤가 예쁘냐? 난 잘 모르겠는데.’ 하며 주변의 친구들과 투덜댔다. 투실투실 살이 오르기 시작한 나는 애초에 그 무리에 끼기는 글렀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그 반대의 생각에 사로잡혔다. 남자처럼 힘이 세졌으면 좋겠다는 생각. 예쁜 것도 아니고 마른 것도 아닌 투실투실 어중간한 내 외모가 싫었다.      



마침 집 근처에 해동검도학원이 생겼다. 호구를 쓰고 ‘머리! 머리!’하며 죽도를 휘두르는 생각만 해도 희열이 느껴졌다. 무척이나 검도를 배우고 싶었다. 달리고 공을 차는 운동은 싫지만 검도는 멋있지 않은가. 엄마를 열심히 졸랐고 엄마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는데도 결국 검도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셨다. 처음 검도복과 죽도를 사는 비용만 해도 십만 원이 넘게 들었다.      



사위가 깜깜한 새벽에 검도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자전거를 타고 아무도 없는 공원을 지난다. 검도복을 입은 내가 너무 멋진 것 같아 누가 날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새벽이라 아무도 없다. 그렇게 기분 좋게 검도 학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뿔싸. 검도도 태권도의 태극 1장, 2장처럼 외워야 하는 동작이 있다. 멋진 호구를 쓰고 칼만 휘두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완전 판단 미스였다. 동작을 외우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인데 난 그 동작들을 외우기는커녕 따라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기합을 넣어야 하는데 목소리는 왜 그렇게 안 나오는 것인지. 야아압. 하고 내 입에서 나오는 조그마한 소리가 너무 창피해 뽕! 하고 사라지고 싶었다. 3주 동안은 낸 돈을 생각하며 싫은 걸 참고 꾸역꾸역 갔는데 마지막 한 주는 정말 너무너무 가기가 싫었다. 결국 검도를 하다가 다리를 삐끗했다고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일주일 동안 멀쩡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가 다쳤다는 딸을 병원에도 안 데려간 걸 보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아셨던 것 같다. 검도는 그걸로 내 인생에서 영영 사라졌다.     



내가 운동 신경이 없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전엔 그저 이 운동이 나와 안 맞는 운동이겠거니. 하며 스스로에게 관대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내 운동 실력을 정확히 알게 됐다. 당시 체육 선생님이 수업하실 때마다 내 동작을 따라 하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배구를 처음 배울 때 선생님께서 시범을 보이신다. 그러고는 시범을 보였던 배구 동작을 해보도록 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쭉 훑어보신다. 그러고는 누군가의 동작을 따라 하신다. 엉거주춤한 몸짓,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 

“자, 지금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면 되겠냐?” 

아이들은 모두 까르르 웃는다. 선생님의 눈빛은 나를 향하고 아이들은 ‘아~’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난 항상 최선을 다해 뛰는데도 100m 달리기 기록이 20초가 넘었고 선생님은 천천히 팔과 다리를 좌우로 흐느적거리며 달리는 흉내를 내며 이게 내 모습이라고 했다.

“진짜 내가 저래? 저게 나라고?”

난 엄청 열심히 달리는데 저런 모습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는 웃음을 참으며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구든, 달리기든, 뜀틀이든, 멀리 뛰기든, 배드민턴이든, 그게 뭐든 난 어설펐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 뒤로 난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운동과 거리가 먼 전형적인 사춘기 소녀가 됐다.      



공부 안 한다고 혼나는 일은 있어도 운동 안 한다고 혼날 일은 없다. 게다가 고등학생이 된 후로는 내가 과연 책상 앞에 얼마나 오래 앉아있을 수 있나. 가 내 관심사였다. 엄마의 친한 친구 아들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후 엄마가 말씀하셨다. 

“걔는 하도 오래 앉아있어서 엉덩이에 땀띠가 났다더라.”

내 목표는 엉덩이의 땀띠가 됐다. 공부가 되지 않을 때, 미련하게 계속 앉아있지 말고 잠깐 운동하고 다시 공부했더라면 훨씬 더 능률이 올랐을 텐데. 하지만 이런 생각은 최근에 하게 된 생각이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에 운동만 한 것이 없다. 몸을 움직이고 땀을 내기 시작하면 꽉 막혔던 뇌에 바람이 불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천근만근 되는 것 같은 걱정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학창 시절엔 아쉽게도 그걸 몰랐다. 늦었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그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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