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 쥐불놀이의 추억
설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면 정월 대보름이다. 예전에는 대보름도 큰 명절이었다고 한다. 요즘의 보름은 오곡밥과 나물을 먹고 달을 보는 날 정도로 지나간다.
어릴 적에 서울 변두리에 살았다. 당시에 살던 사택 옆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와 친구들은 설 명절을 지내고 나면 슬금슬금 나무 조각을 모았다. 산에 가서 솔방울과 잔가지들을 모아왔다. 사택 입구에는 지하실이 있었다. 지금처럼 주차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바닥은 그냥 흙바닥이었고 층고도 낮았다. 국민학생인 우리가 설 수 없는 높이였다. 늘 습하고 어두웠다. 그곳은 우리들의 잡동사니를 숨겨두기 딱 좋은 장소였다.
며칠을 그렇게 대보름을 위하여 준비했다. 아무리 나뭇가지와 솔방울을 많이 모았다 해도 이것이 없다면 꽝이다. 바로 깡통이다. 요즘은 재활용센터에 가면 흔하디 흔한 것이 깡통이다. 내가 한창 깡통을 신나게 돌리던 1980년대 후반엔 깡통이 귀했다. 그땐 분유를 먹이는 집이 별로 없었다. 꽁치 깡통은 작았다. 분유 깡통 정도는 돌려야 쥐불놀이할 맛이 났다. 몇 날 며칠 눈에 불을 켜고 분유 깡통을 찾아 헤맸다. 깡통을 구하면 그 다음엔 깡통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바람이 드나들어야 불이 잘 붙고 탄다. 깡통 기둥에 빙 둘러 가며 목을 대고 망치로 쳐서 구멍을 낸다. 이때 힘 조절을 잘 못하면 깡통이 찌그러진다. 이때 나의 실력이 발휘된다.
나는 여자이다. 하지만 친구들 기억 속 나는 여자가 아닌 ‘선머슴’이다. 달리기도 잘했고, 겁도 없었다. 어떤 놀이든 잘했다. 공기, 고무줄, 땅따먹기. 오징어 게임, 비석 놀이는 물론 딱지치기도 잘했다. 구슬치기도 했다. 깡통 구멍을 잘 뚫을 뿐 아니라 불도 잘 붙였다. 깡통 속에 넣을 숯을 만들기 위해선 우선 모닥불을 붙여야 한다. 이때 두 번째 실력 발휘를 한다. 나무를 세워 공기가 들어가게 원뿔 모양으로 만든다. 그 틈에 마른풀을 넣고 성냥불을 붙인다. 부채질에 입을 동그랗게 말아 바람을 불어 넣는다. 어느새 불이 활활 탄다. 주황빛 불빛이 나는 검은 숯을 깡통에 넣고 솔방울을 더 넣는다.
본격적인 쥐불놀이의 시작이다. 사택 운동장엔 커다란 불꽃이 원을 그린다. 깜깜한 밤에 불꽃은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꽉 잡고 돌려야 한다. 가는 철사는 손가락 마디 주름에 꽉 껴서 잘 잡아야 한다. 대보름 뒷날엔 열에 아홉은 물집이 잡혀있다. 때로는 살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나기도 한다. 어느 정도 불이 사그라들면 하늘로 깡통을 던진다. 하늘도 올라간 깡통 속의 잔불이 폭죽처럼 흩어진다.
한 번은 큰일을 낼 뻔한 적이 있다. 아니 큰일을 냈다. 공중으로 던진 깡통이 놀이터 가에 심어 놓은 향나무 위로 떨어진 것이다. 겨울 날씨에 말라 있던 향나무엔 불이 붙었다. 수박색보다 짙은 잎이 가득 찼던 향나무에 불이 붙어서 활활 탔다. 연기 향에 향나무 냄새가 났다. 타닥타닥 나무가 탄다. 내 속도 탄다. 사택 놀이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소방서가 있었다. 혹여라도 소방차가 달려올까 봐 얼마나 속을 태웠던가. 그날은 분유 깡통 속 숯불보다 내 마음이 더 까맣게 탔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쥐불놀이 장소를 옮겼다. 놀이터보다 더 넓고 불이 안 붙을 곳으로. 그곳은 솔방울을 주워 모으던 동산이다. 단 중턱에 예비군 훈련장으로 쓰이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삼 년 내내 그곳에서 나와 친구들은 열심히 팔이 빠지고 물집이 잡히도록 깡통을 돌렸다. 그리고 맘 놓고 깡통을 멀리멀리 던졌다. 쥐불놀이할 때 여자는 나 혼자였다...는 것은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