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읽기 16. 박완서 장편 소설 『오만과 몽상』③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도배장이는 남상이를 낳고...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 기업인을 낳고, 악덕 기업인은 현이를 낳고...
부유층은 대부분 보험에 가입이 돼 있으니까 터무니없이 싼 비용으로 의료 혜댁을 받게 되고. 그러니 저절로 감기 꼬뿔, 어젯밤 숙취에까지 종합병원 특진을 청하는 호강을 하게 되고 병원은 그 몫을 가난한 일반환자들이 병원비가 무서워 적절한 시기를 놓치고 큰 병이 된 후에야 집 팔고 땅 팔고 빚까지 얻어서 마련한 원한 맺힌 돈으로 충당을 한다면 얼마나 가공할 불합리냐? 끔찍한 일이지.
p.19
그는 결코 그의 아기를 부자처럼 키우고 싶거나 부자로 만들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아기만은 돈 같은 건 의식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라도록 하고 싶었다. 그가 그의 가문의 빛나는 기적으로 움트지 못한 게 순전히 가난의 무게 때문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걸 제거하는 일에 그는 매일매일 조바심했다.
p.218
한 남자에 의해 자신이 재봉틀 기름으로 소모되는 운명을 면할 수 있기를 바라는 영자의 꿈과 여자도 사람이란 걸 인정해주는 남자만 만난다면 사랑을 하고프다는 성혜의 꿈은 그 여자들에겐 각각 최소한의 겸손한 꿈이겠지만 현에겐 아니꼽도록 과람해 보였다. 그는 그 두 개의 작은 꿈을 동시에 유린할 수 있다는 데 가학적인 쾌감을 느꼈다. 가책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받을 가책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변명까지 벌써 마련해놓고 있었다. 미싱공에게 의사가 가당치도 않은 것처럼 간호원에게도 의사는 과람하거든. 나는 내 가치를 스스로 알고 있고 거기 맞게 처신하고자 할 뿐이야.
p.59
그는 고통스럽지만 보람 있는 삶을 예감했다. 남의 생명과 고통을 위한 헌신까지도.
그 바보 같은 계집애는 죽음으로써 그로 하여금 생명에 눈뜨게 했다. 하마터면 생명에 눈먼 채 의사가 될 뻔했다. 두려운 일이었다.
현은 그곳을 떠나기 전에 위령탑에 들꽃을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들판에 서려 있는 건, 아직은 봄의 예감일 뿐 들꽃은 피어나기 전이었다.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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