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주의자에서 감흥주의자로
어린 시절부터 성실함을 미덕으로 살아왔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개근이 당연한 것이었고, 지금도 뭔가 하기로 되어있는 것은 누군가가 압박하지 않아도 홀로 부담을 느낍니다. 실수를 두려워했습니다. 실패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못하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성향은 신중함과 계획적인 J의 성향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그것을 하기 위한 철저한 계획이 머릿속에 그려져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여행을 간다고 하면 출발부터 돌아오는 시간까지의 모든 스케줄이 머릿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하다못해 어디론가 이동하는 길도 미리 다양한 블로그의 사진을 통해 미리학습 했습니다. 가려고 계획한 음식점의 메뉴를 미리 공부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실수와 실패가 적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이 저의 성향에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획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굉장히 당황해했고, 몸에서는 식은땀이 흥건하게 흐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단순히 성향을 넘어 저의 몸에도 맞는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직장에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으며 더 이상 실수와 실패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직장에서는 당연하게도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결혼을 하며 배우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소한 것부터 다름을 느끼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매 순간 저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리고 한 살 한 살 먹으며 신경 쓸 것이 많아지고 해야 할 것이 많아지며 더 이상 계획을 깊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을 더욱 쪼개고 정신을 집중해서 어떻게든 계획을 짜려는 시도를 지속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여전히 유효했지만 세상의 불확실성을 담기에는 나의 시간이 유한함을 깨닫기만 했습니다. 계획에 따라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에는 실망하지 말자는 마음을 갖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말은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또한 지나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약간의 정신적인 위로도 받고 스스로 합리화도 하려 했지만, 그럼에도 주요한 감정은 스트레스였고 거의 7~8년간 이러한 감정이 지속되었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여행을 준비하던 어느 날, 여행이 더 이상 설레며 기다려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숙제로 느껴졌고 부담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계획을 세워서 여행지에 가면 마치 이미 다 알고 간 것을 확인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저런 블로그에서 이렇다고 했는데 정말 그러네? 정도의 처음 가는 곳이지만 마치 여러 번 가본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반면 아직도 배우자와 이야기하는 기억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방문했던 바게트가게, 길거리에서 우리에게 캐리커쳐를 그리라고 한 화가에게 거절을 했더니 '인색 코리안'이라고 했던 말, 교과서나 사진이 아닌 실제로 처음 본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 등 의외성과 이질감이라는 것에서 온 상황들이었습니다.
계획주의자의 삶은 단기적으로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길게 보면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으니 인생의 순간을 기억하는 관점에서는 실패였습니다. 반대로 의외성 이질감의 순간은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이 있지만 이렇게 글에도 쓸 만큼 기억에 가슴에 남았으니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훨씬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작은 상황에서부터 계획을 짜지 않습니다. 마음의 안정보다는 새로운 감흥을 추구합니다.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새로운 공간을 경험하는 순간인 식당방문에서도 감흥을 얻고자 절대로 식당의 정보, 특히 사진을 찾아보지 않습니다. 딱 식당에 들어섰을 때 음식이 나왔을 때의 어떤 느낌을 받고 싶었습니다. 여행을 갈 때는 숙소만 잡아놓고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요청으로 찾아야 한다면 다음날 일정이나 식당을 전날밤 찾습니다. 직장에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면 이전에는 짜증이 났지만 이제는 어떻게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누군가 일을 요청하면 win-win 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며 나의 일에 얹어 활용하려 합니다.
감흥주의자. 제가 추구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특히 일을 할 때는 계획주의자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계획대로 가지 않은 것을 스트레스받지 않습니다. 계획대로 되면 그 또한 좋은 일이나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감흥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계획주의자도 되었다가 감흥주의자도 되었다가를 왔다 갔다 하며 그 진자운동을 즐깁니다. 한쪽으로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것을 많은 힘을 필요로 하기에 지속가능한 방법을 추구합니다. J와 P사이를 오늘도 반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