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없는 초능력 일기 01.
글자 하나만 지워줘.
서빈의 부탁이었다.
쓸없능. 모든 사람이 쓸모없는 능력 하나를 살아가는 사회에서 내가 가진 능력은 고작 ‘글자 지우기’였다. 키보드에 놓인 백스페이스만큼도 못하는 능력은 안내판에 잘못 출력된 글자를 지우는 용도로 밖에 쓰이지 않았다. 능력을 자각했을 때는 얼마나 허탈했던지. 그나마 산우의 능력이 ‘마우스 우클릭 빨리하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내 그 능력을 티켓팅에 써먹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슬퍼졌지만.
우리 집 앞 가로등 몸통에 붙은 안내판, 거기 글자 하나만 지워줘.
서빈의 능력은 ‘구멍 뚫기’였다. 글자를 지워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왜 본인의 능력을 쓰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으나, 가로등 몸통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귀찮은 몸을 일으켜 비척비척 그곳까지 걸어온 길이었다.
멀쩡한 안내판을 생각하고 온 것과 다르게, 이미 붙어있던 안내판은 너덜너덜하기 그지없었고, 바람이라도 불면 휙 떨어질 것 같이 위태로웠다. 혹여나 기물파손으로 덤터기를 쓸까 빠르게 안내판 글자 위로 손을 얹었다. 지워져라. 머릿속에 하얀 공백을 떠올리고 짚었던 손을 떼자 깨끗하게 지워진 글자가 보였다.
< 레기 투기금지>
얘는 왜 쓸데없는 일을 하지?
글자 하나가 사라진다고 달라질 일도 없을 텐데.
임무를 완수했다는 문자를 보내자마자 고맙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기가 찜찜해 가로등 아래 미적거리고 있는데, 서빈이 내려왔다. 양손 가득 쓰레기봉투를 들고.
“고맙다, 진짜.”
자연스럽게 쓰레기 묶음을 가로등 아래 내려놓는 서빈에게 여기 투기금지야,라고 한마디 했더니 서빈이 이젠 아니야, 하고 답했다.
“시레기인지 쓰레기인지 알 게 뭐야.”
어이가 없어 바라만 보고 있는데, 서빈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섰다.
<끝.>
photo. 김라면
write. 김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