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편
지금까지 초등 편을 연재하면서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것은, 저와 제 아이가 어떻게 했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하지 않은 것들을 한번 모아보았습니다.
초등 고학년 시절 제 아이의 일상은 '9 to 6'라고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12화 참조). 밤 9시면 잘 준비를 하고, 새벽 6시에 일어나는 '아침형 아이'의 수면 습관을 가리키는 말이었죠.
그보다 더 어릴 때도, 아이는 아침 7시쯤이면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나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등교 준비에 꽤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 했고, 그때부터 제가 아이를 깨워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이를 깨울 때 어떻게 하십니까?
제가 하지 않은 것, 첫 번째는 "일어나라"라고 소리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영유아기 때 실패했던 것 중 하나가 분리수면이었습니다(1편 20화 참조). 그래서 초등시절에도 아이는 저희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
아이를 깨울 시간이 되면, 저는 멀리서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방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빛을 막고 있던 암막 커튼을 열었습니다.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면, 아이에게 "일어날 시간이네." 하고 조용히 말하며, 웅크리고 있던 몸을 천천히 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때처럼 쭉쭉이 하듯 주물러 주고, 기지개를 켜게 이불을 살짝 걷으며 '키 크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키 큰다, 키 큰다, 아빠보다 더 커보자."
사실, 지금도 아이가 한 달에 한번 집에 내려오면, 저는 그때처럼 아이를 깨웁니다. 아이는 밥보다 잠을 더 원하지만, 오랜만에 집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방문을 살며시 두드립니다. 이제 스무 살을 갓 넘겨 그런지, 아직도 키가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 같아, 그럴 때마다 '키 크는 주문'도 함께 외우곤 합니다.
제가 하지 않은 것, 두 번째는 "공부해라"라는 말입니다.
앞서 초등 편 에필로그(20화 참조)에서도 썼듯이, 초등 시절은 아이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공부해"라고 말하기보다는, 함께 공부하는 방향으로 아이를 이끌었습니다.
어쩌면 제 아이의 초등 시절엔 특별히 중요한 시험도 없었고, 숙제를 하고 간단한 테스트를 준비하는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에 굳이 "공부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저 아이가 즐겁고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방과 후엔 숙제와 독서를 통해 하루를 정리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하지 않은 것, 세 번째는 제 아이를 남과 비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알파맘이 되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정보를 모을 때도(02화 참조), 영재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을 때도(14화 참조), 저는 남과 비교하기보다는 제 아이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제가 아이를 남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우물 안 개구리'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즉, 오로지 제 아이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하지 않았다"라기보다 "비교라는 개념 자체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그 덕분에 제 아이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것이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지 않은 것, 네 번째는 아이에게 자격증 시험을 준비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이를 키울 무렵에는 한자 급수나 한국사 자격증 같은 시험이 한창 유행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시험 준비를 하고 매년 급수를 올릴 때, 저는 그 흐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 당시 붐은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 자격증이 지금 꼭 필요한 걸까?'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고, 나중에 아이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이가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라고 했다면, 시험에 대해 알아보고 도와주었을 겁니다. 혹은 제가 보기에 지금 이 시기에 꼭 필요한 시험이라 판단했다면, 먼저 나서서 정보를 찾아보고 아이의 의견을 물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저는 굳이 학교 공부와 병행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시험 대신 독서를 통해 세상을 넓히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자는 책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히고, 한국사는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이해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하지 않은 것, 또는 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 중 하나는 아이에게 "명령하기"입니다.
물론, 아이가 유아기였던 초보 엄마 시절에는 아이에게 '하기 싫어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명분으로 '명령어'를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밥 먹는 시간이야. 밥 먹어.", "OO이 이 닦아라." 같은 뉘앙스로 말이죠.
하지만, 아이가 말대꾸(?)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엄마, 저한테 명령하지 마세요."
아이의 말에 당황했지만, 저는 침착하게 되물었습니다.
"그럼, 뭐라고 할까?"
"~~ 하자. 이렇게 말해주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요."
아직 제 가슴팍에도 오지 않는 쪼끄만 꼬맹이 녀석이 제게 제안을 했을 때, 사실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말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기분이 상했다면, 그건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저는 말을 가려가며 하려고 애썼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입니다.
"OO아, 아침 먹어." >>> "OO아, 아침 먹자."
"저녁 먹고 공부방에 들어가." >>> "저녁 먹고 공부방에 들어가 볼까?"
아이의 말 한마디에 의해 순화해서 말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 좋은 점도 생겼습니다. 가끔 욱하는 성질머리가 올라오더라도, 일단 한숨 고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속으로는 '왜 이렇게 꼼지락거리는 거야!'라고 할지언정, 아이에게 말할 때는 "벌써 8시네."라고 한 것(12화 참조)처럼 말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엄마의 한계를 넘어서는 아이의 이상행동(?)이 포착되기도 합니다. 흔히 '미운'이라는 단어와 결합해 미운 세 살, 미운 다섯 살, 미운 일곱 살 등으로 불리는데, 저는 이 시기에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아이의 정서적 발달과 학습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미운 세 살은 자아가 형성되느라, 미운 다섯 살은 옳고 그름과 논리 등의 사고력이 발달하느라, 미운 일곱 살은 사회성과 자기 중심성이 충돌하느라 그렇다고 생각하면, 조금 짠하지 않나요?
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아이들은 그저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특히,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 아이는 내면의 자아와 사회 속 한 인간으로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됩니다.
우리, 이제 '미운' 대신 '기특한' 혹은 '짠한'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로 봐주면 어떨까요?
잘 자라고 있음에 감사하고, 조금씩 성장하는 내 아이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사랑을 듬뿍 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하지 않은 것들이 제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결정이 제 아이에게 맞춘 솔루션이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도 아이에게 맞춘 '하지 않을 것들'의 목록을 한번 고민해 보시길 바랍니다. 분명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아이와의 관계도 한층 더 좋아지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