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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14. 2020

나에게, 요가

'찰리 스타일' 요가

나는 15여 년 전, 존스홉킨스 대학 캠퍼스에서 요가를 시작했다. 충분히 잠잘 시간도 없이 연구활동과 공부가 바쁘게 쳇바퀴 도는 세상 빡센 박사과정을 따라가며 허우적대는 나에게, 운동도 같이 해야 공부할 체력이 더 생긴다고 '로렌쪼'라는 이탈리아 친구가 권하는 대로 그의 요가 수업에 한 번 따라갔던 것이 요가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 날 그 자리에서 요가에 첫눈에 반해 흠뻑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날 그곳에서 경험한 요가가 나에게 너무나 필요한 무엇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날 처음 만났던 '로렌쪼'의 요가 선생님 '찰리'는 이후 나와 2년을 함께 한 나의 첫 요가 쌤이 되었다. 


'찰리' 쌤은 매우 인도화가 많이 된 백인 청년이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끝단이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인도 할아버지 파자마 같은 누런 옷을 입고 있던 단벌 신사인 그는, 요가하는 내내 표정 또한 만면에 웃음을 띤 단벌 표정이었는데, 인공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듯, 그가 빙구 웃음을 한껏 웃을 때면, 썩은 이빨을 뽑아내고 (혹은 깎아내고) 그 자리에 아무런 미화를 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둔 듬성듬성 비어있는 치아구조가, 하얗고 완벽한 치아 강박증에 시달리는 듯한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대조적으로 매우 신선해 보였다.


'찰리'쌤은 듬성듬성한 치아구조만큼이나 요가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도 듬성듬성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 수업에만 참여하다가, 나는 점점 더 자주 찾아가, 새벽과 저녁 하루에 2번 만나기도 했는데, 수업 내용이 전혀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날그날 달라요. 그때그때 달라요.' 


그런 느낌의 요가 수업이었다. 요가 쌤 자신도 뭔가 체계적인 요가 강사 훈련을 받았다기보다, 인도의 거리에서 도 닦듯 떠돌며 몸에 저절로 익은, 물 흐르는 대로 요가를 하는 느낌. 


요가 강사가 되려는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찰리' 쌤 빙구 미소만 봐도 스트레스가 탁 풀리는 느낌이었으므로 내게 수업 구성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긴장감 1도 없이 오래전에 방귀를 튼 사이처럼 학생들을 대하는 게 가장 좋았고, 수업이 매번 수학 공식처럼 같은 음악에 맞추어 짐작 가능한 순서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나마스떼~' 같은 인도식 인사를 매번 마칠 때마다 강박적으로 하지 않는 것도 좋았다. 자신의 몸에 익어 생활이 된 요가를, 밥을 떠먹듯 부담 없이 이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참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그는 기분 내키는 대로 어떤 날은 기타를 들고 와 기타를 연주하기도 하고, 자신이 만든 것 같은(?) 저세상 노래를 부르기도 했던 게 기억난다. 가끔은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하나하나 일어나 다 떠날 때까지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찰리 스타일' 요가를 배운 탓에 나는 이후 지금까지 혼자 요가를 하면서, 내가 요가 동작을 똑바로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이게 무슨 스타일 요가인지, 어떤 동작들로 요가 루틴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게 고민한 적이 없다.


나에게 요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힐링 행위다. 


나는 그냥 그날그날 내 몸이 이끄는 대로 나무가 되었다가, 산이 되었다가, 개가 되었다가, 독수리가 되었다가, 뱀이 되기도 하고, 벌레가 되었다가, 개구리가 되기도 한다. 나무도 매일 똑같은 나무가 아니다. 어느 날은 뿌리를 깊게 내리고 굳건히 서서 미동도 하지 않는 나무, 어느 날은 봄바람에 꽃잎을 마구 흩날리는 봄처녀의 마음 같은 나무, 어느 날은 세찬 폭풍우에 이리저리 휘어지며 흔들리는 나무,... 내가 될 수 있는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무궁무진하다.


나에게 요가는 숨을 편하게 하는 숨 고르기다. 


바쁘게 몰아치는 박사과정 생활 속에서 그것이 유일하게 숨 쉬는 시간이 되어 주었던 경험이 있기에 나는 어떤 상황에도 요가가 내 숨을 고르고 바로잡아 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임을 늘 기억한다. 요가는 내게 모든 상념을 잊는 휴식일 때도 있고, 모든 호흡과 움직임으로 내 마음을 초월적 대상에게 표현하는 기도일 때도 있고, 시체처럼 누워 땅으로 꺼져 드는 죽음일 때도, 다시 불을 피우고 에너지를 불어넣는 워밍업일 때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내 숨을 제대로 고르고 바로 잡을 수 있도록, 숨을 짓누르는 모든 부담과 힘듦을 솎아 내는 과정이다. 


나에게 요가는 에너지 청정기다. 


온몸의 숨을 끌어 모아 내뱉으며 모든 악한 기운을 축출해 낸다는 생각을 하고, 새 숨을 온몸 구석구석 들이마시며 모든 좋은 기운을 다 끌어 온다는 상상을 한다. 이것 또한 '찰리' 쌤 이 늘 주문처럼 말해준 것이 뇌리에 박힌 것이다. 요가를 하는 동안 내 몸 구석구석을 좋은 기운, 선한 에너지로 채우기 위해 이 청정기는 쉼 없이 돌아간다. 숨을 빼고, 새 숨으로 채우고, 또 숨을 빼고 새 숨으로 채우고,... 숨은 요가에 있어 자동차의 엔진 같은 것이다.


나에게 요가는 심신을 돌보는 가장 미니멀한 처방이다. 


요가는 마음 수련이기도 하면서, 전신 운동이기도 하다. 요가는 나에게 많은 것을 주지만, 나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매트 한 장과, 약간의 공간, 그리고 40분 정도의 시간이면 전신을 움직이는 데 충분한 시간이다. 요가는 내 몸 하나 누일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건 할 수 있다. 매일 요가를 하는 한, 매일 명상 시간, 기도 시간을 충분히 갖는 셈이 된다. 최소한의 소유, 최소한의 활동으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미니멀 라이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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