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는 날씨를 가리지 않는다. 추워도 뛴다. 더워도 뛴다. 비가 와도 뛴다. 진정한 고수는 장비를 탓하지 않듯, 러너는 날씨를 탓하지 않는다. 요즘은 비닐하우스 트랙도 곳곳에 생기고 있다고 하니 악천후는 더 이상 러너에게 핑곗거리가 되지 않는다.
날씨마저 도와준다면 뛰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요즘 같은 추운 겨울에도 가끔 따뜻한 날이 선물처럼 찾아온다. 러너에게는 놓칠 수 없는 날이다. 그런 날 뛰지 않고 지나친다면 묘한 죄의식까지 느끼게 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했다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이다.
러너는 거리를 재는 방법이 남다르다. 대중교통으로 몇 분, 도보로 몇 분이 아니다. 러너의 기준은 뛰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와 소요시간이다. 가끔 자신의 속도를 과신하여 시간 약속에 늦을 때도 있다. 러너들의 모임에 늦었다면 면죄부 역시 뛰어왔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약속은 못 지켰어도 정상참작을 위해서 열심히 뛰어왔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러너들은 뛰어다니는 종합병동이다. 저마다의 취약부위가 있고 저마다의 통증에 시달린다. 가끔 러너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각자의 아픈 부위를 신나게 털어놓는다. 각 증상에 맞는 치료법과 병원을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증상도 다양하고 아픈 부위도 참 다양하다. 아프다고 해서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는 또 아니다. 아픈 사람들이 여럿 모여있음에도 분위기는 사뭇 밝다.
의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환자가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러너도 물론 포함이다. 뛰지 말라고 해도 또 뛸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러고서는 또 아파서 찾아올 것이 뻔하기 때문에.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수익'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환자가 계속 병원에 찾아오는 게 의사가 그리 싫어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아프면 안 뛸 만도 한데 왜 러너들은 뛰는 걸까. 뛰어야 사는 러너의 숙명 때문이다. 아프다고 러닝을 거르게 되면 안아플까.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음이 답답할뿐더러 몸도 아프다. 뛰어도 몸이 아프고 안 뛰어도 몸이 아프다. 그렇다면 안 뛰고 몸이 아플 바에 차라리 뛰고 나서 아픈 걸 택하는 것이다. 그래야 아프더라도 후회가 덜하다.
길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러너에게 최고의 계절인 봄이 다가오고 있다. 봄 러닝의 묘미는 역시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함께하는 벚꽃런이다. 각종 마라톤 대회들도 본격적으로 개최되어 겨우내 움츠렸던 러너들의 몸과 마음을 설레게 한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럼 올해도 한번 신나게 뛰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