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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dia Youn Aug 04. 2022

당신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가치가 있다

 굳어진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무미건조한 삶에 더 이상 사랑이라곤 없을 것 같았으니까. 더 이상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일말의 기대감조차 없었다. 기대할수록 실망만 했으니까. 혼자만이 가장 온전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순간에는 항상 감정의 소모에 지쳐갔으니까.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모두의 앞에서 웃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모두에게 마음의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진심은 항상 바래진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을 말하는 순간부터 상대에게 닿는  사랑은 쉽게 부서졌으니까.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터져 나오는 진심을 어떻게든 숨겨야만 했다.  다른 상처를 받기엔 이미 너무 곪아있었으니까. 혼자서 약을 바르고  발랐다. 진심을 말하지 않음으로.


 모두가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을 붙잡는 바보는 없으니 누가 오고 가더라도 그러려니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어코 바람이 붙잡고 싶을 때는 바람에 휩쓸려가도 좋다 하며 사랑을 말하곤 했다. 참기 어려운 순간들에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음으로.


 시작과 끝을 같이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에 분개했다. 시작이면 그냥 시작이면 되는 것을 왜 끝을 생각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끝을 생각하지 않고 마주한 마지막이 너무 서러웠기에 눈물을 닦으며 시작부터 끝을 생각하게 되었다. 끝을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들으면 숨이 막혀왔다.


 허망한 약속이라도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말을 바랐다. 입으로 만이라도 그 말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빨리 스쳐갈 바람인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모든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믿을 수 없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작은 행동에 무게를 싣기는 싫었지만 평생일 것 같은 몸짓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바람이 불던 언덕에 레몬 씨가 날아왔다. 어디서 어떻게 날아온지도 모르는 사이에 언덕에는 레몬 씨의 자리가 생겼다. 레몬 씨는 언덕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전부 이해해주는 것 같은 넓은 언덕이 좋았다. 레몬 씨는 힘을 주어 언덕 깊숙이로 파고들어 간다. 어느샌가 레몬 씨가 자신의 피부 안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챈 언덕은 레몬 씨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너는 누구냐 묻는다. 레몬 씨는 당신이 나를 이리로 불러내었다고 말한다. 당신의 목소리에 이곳에 이끌려 왔다고. 당황한 언덕은 모든 바람을 무시한 채 레몬 씨를 키워내는 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레몬 씨는 기하급수적으로 자라 작은 레몬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모든 것을 언덕에게 맡기며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귀여운 작은 레몬이 달린 나무를 바라보며 언덕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도르르 레몬이 하나 떨어지며 돌부리에 부딪혀 살짝 터졌다. 레몬에서 흘러나오는 즙은 언덕이 처음 느껴보는 상큼함이다. 언덕은 모든 바람을 흘려보내며 다시 생각한다. 이 나무의 존재 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이전 07화 순간의 사랑들과 성찰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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