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깎고 무뎌지게 만들어도 나라는 인간의 본성은 유지하고 있구나
아내가 아이들과 친정에 갔다. 친정과의 거리는 차로 5분이기 때문에 매번 같이 갔었지만, 요즘 힘들어하는 나에게 아내는 자유를 준 것이다. 무얼 해볼까 생각을 하다가 걷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언제나 할 수 있지만, 마음먹고 걷는 것은 다르니까. 해외여행의 추억보다 걷다가 보고 느낀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26살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많았고 체력도 충분했지만 경제적으론 부족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은 크게 문제 되지 않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나는 4박 5일 동안 걸어서 진주에 도착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땅끝마을까지 가지 못했다. 당시 유행하던 예능 일박이일처럼 남의 집에서 노숙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모텔이나 여관, 찜질방에서 지출한 비용이 많았고 수중의 돈이 떨어지고 나서 여행은 끝이 났다. 내가 걸었던 며칠은 단 두 시간으로 끝났다. 시외버스는 막힘없이 잘 달렸고, 나는 창밖을 하염없이 봤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가 생각난다. 땅끝마을까지 걸어갔더라면 어땠을까? 내 삶이 바뀌었을까? 지금 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진 않았을까? 세상의 값진 것들에 대한 내 좁은 식견이 더 나아지긴 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내가 갔던 그 루트로 하루를 걸어 볼까 생각을 했다. 아내에게 이야기하니 한마디 한다.
[오빠. 오빠 이제 40이야. 그때처럼 20대가 아니야. 내일 애들이랑 눈썰매장 가야 하는데 지장 있기만 해. ]
눈썰매장에서 아이들과 쉼 없이 놀아줘야 하는데 내 온몸을 불사를 순 없는 노릇이기에 무리하지 않고 걸어서 내가 좋아하던 복성반점 짬뽕을 먹으러 가기로 결심했다.
바람은 차갑지 않고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10시간을 빠른 걸음으로 걷던 당시의 내가 지금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배가 나온 40살의 아저씨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멧돼지가 나올까 봐 걱정하며 맘 졸여가며 저녁 산길을 걷던 내가 짬뽕을 먹으러 가며 걷고 있다. 오랜만이지만 걷고 있어서 좋았다. 차에서 뿜어내는 매연을 마시고 공장냄새도 맡아 가며 걸어 내려간다. 30분쯤 지나니 오른쪽 골반이 아려온다. 오 킬로 남짓한 거리는 생각보다 멀었고 생각만큼 큰 심적인 동요도 없었다. 그냥 걸어 내려갈 뿐.
오랜만에 찾은 복성반점은 조갯살이 사라졌다. 이전보다 국물도 더 자극적이었다. 오르는 재료비와 물가를 생각하면 변하는 게 당연한 걸까?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짬뽕을 먹었다. 한 시간을 겨울바람을 맞아가며 걸어왔는데 뭐든 맛있겠지만 복성반점의 짬뽕은 더 맛있다. 3대 천왕이 방영되고 나서 한동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매장을 이용했다. 우리의 단골이 사라지는 느낌이었지만 지금도 지역주민이 여전히 사랑하는 공간이다. 혼자 와서 한 그릇을 비우면서 예전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리고 어디를 가볼까 생각하다가 카페를 가기로 했다. 내가 학생일 때도 있었던 크 카페. 사장님이 베이스기타를 치는 그곳으로. 15분을 더 걸어서 도착했고 다행히 카페는 문이 열려있었다. 내가 사랑하고 추억이 깃든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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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도 이곳에 와서 글을 썼었다. 지금도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이곳에서 이렇게 글을 남긴다. 내가 썼던 글들을 보면 낯부끄럽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자랑스럽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았구나. 그리고 그 태도가 크게 바뀌지 않았구나. 세월이 깎고 무뎌지게 만들어도 나라는 인간의 본성은 유지하고 있구나. 나 자신에게 칭찬을 해 주고 싶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세상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언젠간 세상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돌하나를 던지는 사람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