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속보로 접했다. 설마, 했는데 설마가 사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한국 현대문학사 100년 만의 쾌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이상문학상 수상작 <몽고반점>을 통해서였다. 그때는 '이걸 왜?' 하고 생각했다. 형부가 처제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내용이어서 해설에서 언급한 탐미주의 운운이 와닿지도 않았고, 욕망의 종국을 그렸다기에도 결말이 어딘가 막장드라마 같아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2016년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에 책을 구입해 읽었다. 그곳에서 <몽고반점>을 다시 만났다. 책에서 접한 <몽고반점>은 전혀 다르게 읽혔다. 단독으로 읽었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을 순서대로 읽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채식주의자)과 형부(몽고반점)와 언니(나무 불꽃)의 시각으로 그려진 연작 시리즈는 몹시 아프게 다가왔다. 사회인으로서 건실한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이 얼마나 생활에 편의적(남편)이고, 욕망에 허약(형부)하며, 관계 맺기에 무력(언니)한 존재인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에서 남편은 아내가 특별한 단점이 없고 무난한 성격을 지녔다는 이유로 결혼을 결심한 인물이다. 그는 아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가는 상황에서도 구두의 짝을 제대로 맞춰 신고 나서야 "현관문을 열고 나갈" 만큼 철저한 사회인이다. 그에게 아내의 채식주의는 그저 불편하고 괴이한 현상이다.
<몽고반점>에서 형부는 그림을 전공한 예술가다.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자신의 작품 세계다. 어느 날 처제의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처제를 통해 자신의 예술이 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그가 지향한 예술은 '성욕'과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끝내 지켜내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접어든다.
<나무 불꽃>에서 언니는 책임감 있고 정이 많으며 "신중한 뒷모습"을 지닌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의 인간이다. 그녀는 "진창의 삶을 남겨두고 경계 저편으로 건너간 동생의 정신을, 그 무책임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생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녀는 이미 일어난 모든 일들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곱씹고 또 곱씹을 뿐이다.
채식을 고집하는 주인공 '영혜'에게 육식은 '단백질'을 공급받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그녀에게 육식은 '목숨'을 삼키는 일이다.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P. 61)
'목숨'으로 치환된 '고기'는 그녀에게 결코 삼켜지지 않는 물질이다. 하지만 주변인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소설은 치환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치환하고자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나는 소설을 읽는 행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이해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선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설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심연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 이외 그 누구의 심연도 들여다볼 수 없는 인간에게 소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한강 작가의 책은 모두 예약으로만 판매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번역본이 아닌 원서로 수상작을 읽을 수 있다는 벅참에서 비롯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이유이든 참 즐거운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