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1.
너는 아직 이런 얘기 좋아할 것 같아서
잘 지내? 연락하고 싶었는데 못 했어. 넌 그 동안 승진도 하고 아파트도 샀나 보더라. 가끔 인스타에서 봐. 더 세련돼졌던데? 애들이 너 많이 부러워해. 난 근데 그런 애들이랑은 달라. 너도 알지? 내가 왜 널 좋아하는지. 아직 나한테 화나 있는 걸까. 어색하게 너한테 연락해서, 결혼은 했냐 어디서 일하냐 남편은 뭐하냐 이런 얘기나 하고 싶진 않아서 연락 안 했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넌 단번에 알지? 여전히 영리할 거야.
이제 내가 이런 얘기하는 거 싫어하려나? 그래도 난 아직 너랑 이런 얘기 하고 싶은데. 미안해. 난 아직 너 많이 보고 싶어.
올해 여름은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 아직 8월도 안 끝났는데 벌써 아침에 쌀쌀해. 어제는 발이 시려워서 양말까지 꺼내 신었어. 내가 여름 무지 좋아하는 거 너도 알지? 너도 젤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라고 했었잖아. 너는 예쁜 옷은 다 여름 옷이라며, 나는 잘 생긴 애인은 다 여름에 만났다며 막 박수치면서 좋아했었잖아. 늙어도 여름에만은 재밌게 살자고 네가 그랬었잖아. 그날 맥주맛이 기가 막혔는데. 네가 알려준 맥주, 웨이브. 나 요즘도 그거 자주 마셔. 여름 생각할 때 딱이잖아. 잔도 샀어. 파란 바다에 하얀 파도 타는 서퍼 그려진 거. 너도 알지? 상큼한 과일맛이 나는데, 아마 여름 과일일거야.
우리 살던 동네에 그 테라스 큰 펍, 생각 나? 뚱뚱한 사장님이 너 좋아해서 아사히 생맥 엄청 많이 리필해줬잖아. 그때 너 참 이뻤어. 우리 거기서 맨날 남자 얘기 했잖아. 뭐가 그리 재밌었는지, 가게 문 닫을 때까지 수다를 떠는 것도 모자라 2차로 너네 집 가서 밤새 마시고 떠들었잖아. 다시 만나면 그런 거 못할 것 같아. 그치?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겉모습은 많이 변했어. 근데 난 사실은 하나도 안 변했어. 왠지 너도 하나도 안 변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아직 이런 얘기 듣고 싶어할 것 같아서.
여름, 아빠, 물개
예전에 어릴 때, 빨간 벽돌로 된 이층집에 살 때. 게으른 사장님이던 우리 아빠는 나랑 놀 거라고 자주 일찍 퇴근했었어. 그럴 땐 전화로 아빠가 물어봐.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난 그럼 항상 양념통닭 먹고 싶다고 그랬어. 그땐 그게 왜 그리 좋았는지. 그럼 아빠가 그 노란 봉투 알지? 똥색 봉투. 그거 두 개를 양 팔에 안고 와. 하나는 켄터키, 하나는 양념 통닭. 아마 그날은 엄마가 계모임 같은 데 가고 없었던 날이었나봐. 아빠가 도착하면 아빠한테 안겨서 아빠 볼에다가 뽀뽀를 몇 번이나 하구, 아빠는 기분이 좋아서 어떤 날은 업어도 주고, 어떤 날은 목마도 태워주고 그랬어. 저녁 때 아빠 볼에 뽀뽀를 하면 수염 때문에 항상 까슬까슬했거든? 그것 때문인지 이상하게 나는 남자들이 면도하고 한나절이나 하룻밤 정도 지났을 때 그 까슬까슬한 뺨이 좋아. 그래서 가끔은 애인한테 뽀뽀하다 말구 까슬까슬한 뺨에 내 뺨을 막 부벼. 그러고 있음 지금 얘기하고 있는 그날이 생각 나서. 내 첫 번째 애인은 아빠가 맞나봐. 암튼 그러고 나서 거실 마루에 통닭을 펼쳐서 먹어. 여름이었나봐. 유치원생 꼬마였던 나는 런닝에 팬티만 입고 있었고, 아빠는 트렁크만 입고 있었거든. 둘이서 그러고 티비 앞에서 막 통닭을 먹다가, 아빠 문 잠갔어? 하고 내가 물어. 그럼 아빠가 무심하게 아니. 이러거든. 그럼 내가 어? 엄마가 잠그라 그랬어 빨리 잠그고 와. 그럼 아빠가 괜찮아 아빠가 있는데 문을 왜 잠가. 아빠랑 있을 땐 문 안 잠가도 돼. 그러면서 켄터키 치킨을 소금에 툭 찍어서 내 입에 넣어주고 그랬어. 난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젓가락질을 잘 못해서 양념 통닭을 막 열 손가락에 다 묻히고 하얀 런닝에도 막 다 흘리고 먹었어. 열 손가락을 꽃게처럼 다 펼치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묻어 있는 양념을 막 쪽쪽 빨아 먹었어. 그날은 다 씻고 밤에 잠자기 전까지도 손가락이랑 볼에서 달달하고 짭짤한 양념 냄새가 났었지. 그렇게 실컷 먹고 나서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아빠 팔을 베고 낮잠을 잤어. 선풍기 바람이 간지럽힐 때마다 양념 냄새가 살짝살짝씩 지나가고, 찹찹한 마룻바닥에선 서늘한 냄새가 올라왔어. 굳은살이 많아서 까칠한 아빠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한 번 두 번 빗질할 때마다 조금씩 정신을 잃고 빠져들던 잠이 얼마나 맛있던지.
아빠 얘길 너무 많이 했나? 아빠 얘기만 하다가 끝날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어쨌든 아빠 팔 베고 맛있는 낮잠 자던 그 여름이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여름이야.
아마 그 애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여름은 아빠와 양념통닭으로 끝났을지도 모르지.
그 애랑은 수영 동호회에서 만났어. 그렇게 눈에 띄는 애는 아니었어. 관심을 두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안 보이는 그런 애. 그때가 언제였냐면, 음..... 내가 서른 두 살 때였으니까, 2014년이네. 그 해 여름이었어. 동호회 사람들이랑 바다 수영을 한 날 밤. 술에 잔뜩 취해서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렸어. 편의점에서 컨디션을 살까 싶어 걸어가고 있었거든. 근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누나 하고 부르는 거야. 이거 마시려고 그러죠? 라고 하면서 컨디션을 내밀더라구. 너 혹시 물개? (동호회 이름이 물개였어.) 네 맞아요. 서연이 누나 맞죠? 응. 너 여기서 뭐 하니? 누나 따라왔죠. 웃는 게 이쁘더라. 하두 앳되 보여서 갓 제대한 대학생 쯤이겠다 싶었지. 고마운데 얼른 집에 가. 그러니까 누나 혹시 저 누나한테 연락해도 돼요? 그러더라구. 귀여워서 그러든가. 하고 집으로 올라 갔지. 그때 참 좋았는데. 그땐 그런 여름이 내 앞에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 알았어.
그 다음 날부터 그 애는 매일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어.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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