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간 : 백두대간 12구간 (덕산재-삼도봉)
위치 : 경북 김천시 대덕면 ~ 부항면
날씨 : 아침 최저 –5도, 낮 최고 4도, 정상 최저 –9도, 구름 없이 맑은 날씨
산행거리 : 16.1km (마루금 13.1km, 구간 외 3km)
소요시간 : 선두(10시간 54분) 후미(13시간 4분)
참여인원 : 53명 (완주 50명, 중도하산 3명)
요즘 산행의 최대 관심사는 딸이다. 가겠다고 신청해 놓고 중간에 못 가겠다고 내려오기를 반복하고 있어서다. 남편과 아이가 언제 올라오나 기다리며 앞서 가다가 무전기를 통해 아이와 아빠가 하산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으면 맥이 풀렸다. 작은 크기의 등산복, 신발, 겨울장비들을 준비하느라 들인 수고가 생각나 화도 났다.
중도하차, 입구하차를 반복 중이었지만 우리 딸은 자신을 백두대간에 다니는 어린이로 여기고 있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8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백두도 가는데 이걸 못 가겠냐?”며 씩씩하게 앞장섰다.
겨울 산은 데려가지 않기로 했다. 봄이 왔길래 또다시 산에 가고 싶다는 아이를 데려갔다. 봄이 온 줄 알았는데 산은 아직 겨울이었다. 매서운 새벽바람에 딸이 울먹이며 하산했다. 4km 정도 가서 나온 탈출로에서 무릎이 아픈 어른과 열 살 어린이도 하산했다. 딸과 내려갔던 남편은 버스에 도착한 어른에게 딸을 맡기고 대열에 합류했다.
아침 6시 반쯤 출발한 산행이 3시간이 걸려 부항령에 도착했다. 백수리산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을 앞두고 컵라면과 아침보급으로 받은 주먹밥을 먹었다. 눈이 다 녹지 않았지만 겨울장갑을 끼고 가기엔 날이 더워졌다. 겉 장갑을 벗고 가다 나중에는 속장갑도 벗었다. 꽃 한 송이 보이지 않지만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것 같았다. 하얀 눈 위에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나무 가지들이 찢어져 곳곳에 속살을 드려내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오르막을 올라서 12시에 백수리산 정상에 도착했다. 사방이 탁 틔여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굽이굽이 산이 끝없이 펼쳐 있었다. 힘들어도 이런 경치를 보는 맛에 산에 오른다.
봄을 기대하며 왔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석산 가는 길에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막았다. 뿌리째 뽑혀 뒤집어진 나무들도 보였다. 숲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늘에 녹지 않은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가지마다 달고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발견하고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쌓인 눈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다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가지마다 달린 얼음덩이는 비탈길에 난 나무들을 넘어뜨리고 뿌리째 뽑아 뒤집어 버렸다.
고질라와 티라노가 한 바탕 싸우고 지나간 듯한 길을 탈출게임을 하듯 통과해 갔다. 쓰러진 나무의 몸통이 길을 막은 경우는 그나마 나았다. 나무 아래로 기어가거나 위로 넘어가면 되었다. 나무가 뒤집혀 나뭇가지들이 세워져 길을 막아도 괜찮았다. 커튼 열 듯 가지 사이를 벌리며 갈 수 있었다. 나뭇가지에 볼따귀를 맞긴 했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옆으로 누운 나무의 상단이 길을 가리면 갈 수가 없었다. 한 걸음마다 정글 숲을 헤치듯 가야 했다. 뽑힌 지 얼마 안 된 가지는 힘이 세서 발로 밟았다 떼면 바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선두가 지나간 길을 가는데 길이 나있지 않았다. 밟고 지나가면 길이 지워졌다. 박석산에서 삼도봉 가는 길이 세 시간 반이나 걸렸다.
마지막 내리막길이 가파르다는 무전이 왔다. 눈만 쌓이지 않았다면 쉬웠을 길이었다. 계단마다 눈이 얼어 있어 아이젠으로 꽉꽉 눌러가며 내려왔다. 가파른 내리막에 자리 잡고 살던 나무들의 수난시대였다. 우리에게도 수난이었다. 쓰러진 나무들 때문에 길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앞서 내려가던 사람이 길 가에 걸터앉아 있길래 많이 힘든 줄 알았다. 그 자리에 가서야 알았다. 그 자리는 나무가 넘어진 틈을 지나기 위해 걸터앉는 자세를 유지해 그 자세로 지나야 했다.
어둠이 내릴 무렵 아스팔트 길에 도착했다. 여기부터 3 킬로미터를 더 걸어가야 예약된 식당이 있었다. 마음은 뛰어가고 싶은데 내리막부터 아프기 시작한 무릎이 점점 심해졌다. 뒤로 걸으면 좀 나았다. 눈이 얼어 있는 곳은 앞으로 걷고 녹은 곳은 뒤로 걸으며 내려왔다.
저녁 7시가 넘었다. 산에서 해는 빨리 떨어지고 순식간에 컴컴해졌다. 헤드랜턴을 켰다. 머리 위로 별들이 나타났다. 반짝이는 별들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별을 보는 동안은 무릎 아픈 걸 잊었다.
눈이 쌓여 못 올라온다던 식당트럭이 어두워지고도 사람들이 못 오고 있으니 왔다. 후미에 가던 일곱 명을 태우고 내려가면서 걷어가던 사람들을 차례로 태웠다. 운전석 뒷자리와 트럭 짐칸이 배낭과 사람으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트럭에 구겨져 실려가며 나뭇가지에 따귀 맞고, 어깨를 잡히고, 내리막에서 다리가 풀려 넘어지고 자빠진 얘기들을 나눴다. 어려움을 함께 헤치고 왔다는 흥분과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으로 사람들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