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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Feb 16. 2024

나는 외톨이야 외톨이야

군중 속 외로움

외동으로 나서 자라왔기에, 인생은 어차피 혼자구나 친구도 그때뿐이구나 하는 걸 어려서부터 삶으로 체득했었다.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관찰해 보니, 인생길에서 부모 형제 친구 배우자 ㅡ 결국 그 누구도 평생 가는 건 없나 보구나. 결국 우린 각자 태어나서 살다, 각자 자기의 때에 죽게 된다. 그러니 모두 다 찰나의 놀이터에서 만나 잠시 함께 놀다 헤어지는 것뿐이구나. 어쩌면 내가 진짜 행복해지고 자유해지는 순간은, 혼자 있어도 충분히 즐거운 나로 온전히 설 수 있었을 때에만이 비로소 오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리 엄마는 나를 낳고 장과 자궁이 함께 여며져 버렸을 때, 어쩌면 오래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나를 강하게 키우셨다. 아주 혹독한 스파르타였다.

세 살 때 나는 벌써 목욕탕에 가면 알아서 쪼그려 앉아 샤워기로 착착 엉덩이를 씻고 탕에 들어가 아주머니들의 탄성을 자아냈고, 엄마가 머리를 감겨주면 그게 더 얼굴로 물이 쏟아지고 힘들어서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그냥 혼자 머리를 감고 샤워를 다 했었다.

1학년 때는 개봉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역 앞에 내려, 역무원 아저씨께 노란색 종이표를 끊어 1호선을 타고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여 순환열차의 방향을 옳게 타서 교대까지 갔다가, 출구번호 찾아나가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 일정을 마치고 다시 되돌아오는 것까지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어른들도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를 조 앞에 훤히 보이는 초등학교에 혼자 등교하라고 내보내 놓고 어쯔케 잘 간 건지 만 건지 가슴이 졸여지고 그렇던데, 엄마그때 어린 딸에게 들려 내 보낼 폰도 없이, 한번 나가면 아이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어떤 맘으로 버텨내셨을까. 의지가 정말 대단했었구나 하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당시에 가장 혼란스러웠던 기억은 지하철 안에서 이쪽으로 서면 이쪽이 오른쪽이고 저쪽으로 서면 이쪽이 왼쪽이 되는데 대체 내리실 문의 방향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키가 작고 몸집이 말랐던 어린이였기에, 내리실 문 앞에 미리 가서 서 있어야 타고 내리는 어른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이밍 놓치지 않고 내릴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내적세계에 천 개의 필터링 그물을 가진 애니어그램 1번 유형이라 아마 가만히 놔두었어도 딱히 잔소리할 일 을 텐데, 그때는 이런 성격유형이나 기질검사 같은 개념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자기가 언제 부재중이 될지 모르니 만약의 그때에 의지할 곳 없이 외동인 내가 이 험한 세상 잘 헤쳐나가라는 뜻을 품고 아주 똑 부러지게 키우셨다.

그리하여 나는 1학년 때 학교에 입학하고 반 아이들을 보니 유치원도 다녔었다는 녀석들이 아직도 혼자 화장실도 못 가고 가방도 단디 못 챙기고 음식도 흘리면서 먹고 책상 밑으로 지우개며 연필이며 물건을 자꾸 흘리는 그런 모든 모습들 ㅡ 여덟 살짜리 아이라면 누구나 가진 모습들이 깝깝했고 매우 한심해 보였다.


외동이라는 출생 순서와 엄마의 건강에 따른 긴장된 상황, 내가 본래 가지고 태어난 기질과 성격은 나를 더욱더 독립심 있는 아이로, 스스로를 잘 통제하는 아이로 만들었다. 혼자 있어도 크게 심심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머릿속에 항상 생각할 거리들이 많이 떠올랐었기 때문이다.  다 계획이 있었다.



이렇게 스파르타로 마치 해병대처럼 오와 열을 맞추어 인생 독고다이로 살아온 나는 결혼 후 바로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첫 번째 주일부터 외톨이로서의 삶을 한층 더 심화반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내가 서점이든 김밥천국이든 혼자 있어도 눈에 띄지 않았고 그저 군중 속의 한 명이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니 '전도사님 사모님'으로 모든 분들이 다 나를 알고 계시고 곁눈으로 쳐다보시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또 막상 와서 말을 붙여주지는 않으시는.

매 예배와 모든 행사를 참석하지만 사모는 속한 여전도회와 구역 편성이 없다. 가장 교회를 잘, 많이 가는 핵인싸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희한한 상황.

교회도 내가 다니던 곳도 아니고, 스스로 고른 곳이 아니다. 나는 이제 교회에서 다비자매도, 교사도, 청년도 아닌, 내 이름을 잃고 남편 따라다니는 1+1이라고 많이 느꼈다. 휴지 36 롤 사면 붙여주는 고무장갑처럼.


익숙한 것 같다가도 가끔 속상함이 치밀 때가 있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라든가 남편과 사이가 냉랭할 때라든가 남편이 나를 보고도 인사를 안 하고 쌩 지나갔을 때라든가 남편이랑 사이가 안 좋은, 안 좋을 때라던가. (남편이랑 데면데면한 순간 외에는 다른 예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


친구가 가까이 살길하나요

친정이 여기서 가깝길 한가요

마음을 나눌 구역식구가 있길한가요

남편밖에 없거든요

하 참


집에 돌아와 혼잣말을 한다.


점점 연차가 쌓이고,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으신 권사님들 집사님들과 어떤 주제로 어떻게 리액션을 하며 대화를 핑퐁핑퐁 주고받는지 적응이 되어갔지만 난 여전히 이 괴리감을 못 견뎌하는 것 같다.

하하하 어머 권사님~~~ 호호 하하~를 많이 하는, 그런 시간을 갖고 집에 오면 아주 깊은 현타가 옵니다.




#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것이

#그런데 여전히 혼자


#나한테 잘하라고 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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